[사진이 있는 도서관] 주황색의 사랑, 보라색의 슬픔… 팔레트 위 물감 같은 영화 50편
컬러의 세계
찰스 브라메스코 지음 | 최윤영 옮김 | 오브제 | 216쪽 | 1만9800원
1990년대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1994) 속 홍콩은 음악 만큼이나 황홀한 색채로 가득하다. 눅진한 공기 속에 가라앉았던 회색 도시는 연인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클럽의 달뜬 주황색 불빛이 젊은 남녀를 물들일 때, 그 밑바닥엔 파랑, 보라, 초록 색이 슬픔처럼 잔잔하게 깔린다.
히치콕의 걸작 ‘현기증’(1958)에서 어두운 초록색은 두려움이다. 이 영화에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추락 만큼이나 사고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일 역시 신경증적 두려움의 초록색과 함께 온다.
‘쉰들러 리스트’(1993)에서 유대인 게토의 잿빛 군중 사이로 걸어나오는 어린 소녀는 홀로 선명한 빨간색 코트를 입고 있다. 닥쳐올 비극을 아직 모르는 이 소녀에게 채색된 빨간색은 미증유의 악에 직면한 세계를 외면했던 2차대전 초기 미국의 고립주의를 상징한다. 관객은 이 빨간색으로 인해 시체 더미를 불태우는 장면의 수레 위 시신이 소녀인 걸 알아챈다. 반면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1972) 속 어두운 진홍색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담은 피의 색깔, 무의식적 혼란의 상징이었다.
저자는 ‘가디언’과 ‘롤링 스톤’ 등에 기고해온 영화·TV평론가.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같은 고전부터 마블 히어로 ‘블랙팬서’(2018) 등 최근 흥행작까지 색으로 읽을 때 더 잘 보이는 영화 50편을 삼원색(RGB) 컬러 팔레트와 함께 풀어낸다.
슬픈 결말로 끝나는 ‘쉘부르의 우산’(1964)이 음울하기보다 달콤쌉싸름한 애잔함으로 가득한 건 세련된 노르망디 항구 아가씨들의 원색 옷차림 덕.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1986) 화면 속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푸른색과 보라색의 불빛이 아스라이 스며들어 퇴폐적 불안을 고조시킨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끝없는 모래사막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탁한 오렌지 빛 황무지는 반세기의 세월을 넘어 비슷한 톤의 색깔로 공명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걸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의 야외 식당 노란 의자들과 장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2001) 속 황금빛 카페 불빛은 둘 다 사람들 마음 속 심연에 고인 불안과 소외감을 드러내는 장치다. 책장을 넘기며 영화 속 사진과 색채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짚어가다 보면, 책 앞과 뒤의 영화들을 다시 찾아 비교하게 된다.
영화를 볼 때는 잘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때 그 느낌의 정체를 색채를 통해 이해하는 즐거움이 있는 책. 영화광이라면 아직 보지 못한 영화의 장면들을 감탄하며 들여다보다 호기심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할 것이다. 저자는 한국 독자를 위해 새로 쓴 서문에서 새로운 눈으로 영화를 바라보길 권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한번 보는 눈이 바뀌면, 다시는 세상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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