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도서관] 주황색의 사랑, 보라색의 슬픔… 팔레트 위 물감 같은 영화 50편

이태훈 기자 2024. 6. 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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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캘리포니아로 떠났다는 걸 알게 된 남자(양조위)는 슬쩍 웃으며 맥주를 마신다. 경쾌한 노란색 조명 아래 잔잔한 슬픔처럼 푸른색이 깔리는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다산북스

컬러의 세계

찰스 브라메스코 지음 | 최윤영 옮김 | 오브제 | 216쪽 | 1만9800원

1990년대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1994) 속 홍콩은 음악 만큼이나 황홀한 색채로 가득하다. 눅진한 공기 속에 가라앉았던 회색 도시는 연인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클럽의 달뜬 주황색 불빛이 젊은 남녀를 물들일 때, 그 밑바닥엔 파랑, 보라, 초록 색이 슬픔처럼 잔잔하게 깔린다.

히치콕의 걸작 ‘현기증’(1958)에서 어두운 초록색은 두려움이다. 이 영화에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추락 만큼이나 사고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일 역시 신경증적 두려움의 초록색과 함께 온다.

'쉰들러 리스트'(1993) 속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 /유니버설픽쳐스

‘쉰들러 리스트’(1993)에서 유대인 게토의 잿빛 군중 사이로 걸어나오는 어린 소녀는 홀로 선명한 빨간색 코트를 입고 있다. 닥쳐올 비극을 아직 모르는 이 소녀에게 채색된 빨간색은 미증유의 악에 직면한 세계를 외면했던 2차대전 초기 미국의 고립주의를 상징한다. 관객은 이 빨간색으로 인해 시체 더미를 불태우는 장면의 수레 위 시신이 소녀인 걸 알아챈다. 반면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1972) 속 어두운 진홍색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담은 피의 색깔, 무의식적 혼란의 상징이었다.

저자는 ‘가디언’과 ‘롤링 스톤’ 등에 기고해온 영화·TV평론가.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같은 고전부터 마블 히어로 ‘블랙팬서’(2018) 등 최근 흥행작까지 색으로 읽을 때 더 잘 보이는 영화 50편을 삼원색(RGB) 컬러 팔레트와 함께 풀어낸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다산북스

슬픈 결말로 끝나는 ‘쉘부르의 우산’(1964)이 음울하기보다 달콤쌉싸름한 애잔함으로 가득한 건 세련된 노르망디 항구 아가씨들의 원색 옷차림 덕.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1986) 화면 속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푸른색과 보라색의 불빛이 아스라이 스며들어 퇴폐적 불안을 고조시킨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끝없는 모래사막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탁한 오렌지 빛 황무지는 반세기의 세월을 넘어 비슷한 톤의 색깔로 공명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걸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의 야외 식당 노란 의자들과 장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2001) 속 황금빛 카페 불빛은 둘 다 사람들 마음 속 심연에 고인 불안과 소외감을 드러내는 장치다. 책장을 넘기며 영화 속 사진과 색채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짚어가다 보면, 책 앞과 뒤의 영화들을 다시 찾아 비교하게 된다.

장피에르 주네의 영화 ‘아멜리에(2001)에서 아멜리에(오드레 토투)가 일하는 카페를 뒤덮은 황금빛 필터의 질감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걸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의 야외 식당 노란 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 마음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불안과 소외감, 비릿한 메스꺼움을 드러내는 장치다. /다산북스

영화를 볼 때는 잘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때 그 느낌의 정체를 색채를 통해 이해하는 즐거움이 있는 책. 영화광이라면 아직 보지 못한 영화의 장면들을 감탄하며 들여다보다 호기심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할 것이다. 저자는 한국 독자를 위해 새로 쓴 서문에서 새로운 눈으로 영화를 바라보길 권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한번 보는 눈이 바뀌면, 다시는 세상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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