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6·25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실[박종인 기자의 ‘흔적’]
현장 사진으로 분석한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피란민들 사지가 찢겨 허공을 날아 강물로 떨어질 때.’(2023년 6월 28일 ‘오마이뉴스’)
‘피란민 4000여 명이 현장에서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전 신민당보 ‘민주전선’ 편집인 및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이승만 평전’, 두레, 2020, p264)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인민군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많은 사람은 이때 ‘불필요한 조기 폭파’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겼고 그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고 ‘알고 있다’. 또 한쪽에서는 죽은 사람들은 군인과 경찰뿐이라고 주장한다. 74년이 지났지만 정부나 전문기관이 진상조사를 한 적이 없다.
서울시의 동판 교체
호국의 달 6월 옛 인도교인 한강대교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박원순 시장 때인 2016년 서울시가 한강대교 북쪽 끝 인도에 설치한 동판이 지난주 교체됐다.
원래 동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한강인도교 폭파 현장. 6·25 발발 직후 정부의 일방적인 교량 폭파로 피란민 800여 명 사망 – 인권 서울’(옆 사진)
교체된 동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6·25 발발 직후의 교량 폭파로 군중 500~800명의 인명 피해 추정 – 인권 담당관’
‘현장’이 삭제됐다. 당연하다. 동판이 설치된 다리는 1981년에 만든 다리다. 국가의 폭력적 조치를 뜻하는 ‘일방적’이라는 표현이 삭제됐다. ‘피란민’이 ‘군중’으로 바뀌고 숫자에도 오차 범위가 생겼다. ‘사망’은 ‘피해 추정’으로 바뀌었다. 국가의 폭력성이 내용에는 사라졌다. 하지만 디자인은 여전하다. 서울시에 따르면 역삼각형 동판은 ‘국가 폭력 현장’을 뜻한다.
그래도 큰 변화다. 이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자. 불행 중 다행으로 폭파 직후 북한 인민군이 촬영한 사진들과 증언이 남아 있다.
북한군이 증명하는 인도교 사건의 진실
지난 2016년 국립중앙도서관은 미국기록보존소(NARA)가 소장한 북한군 촬영 사진들을 입수했다. 17장짜리 이 사진 묶음은 미군이 평양에서 노획한 자료들이다. 북한 당국은 이 사진들에 ‘적에 의하여 학살된 애국자의 시체’라고 적어 놓았다. 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적에 의하여 학살된 애국자의 시체’를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이 사진 묶음 속에 인도교 폭파 직후 현장 사진 세 장이 들어 있다. 폭파된 상판은 중지도(노들섬)에서 노량진 쪽 두 번째와 세 번째 상판이고 사진들은 첫 번째 상판 상황이다.
파괴된 트럭과 지프차, 시신들이 보인다. 많이 잡아 15~16구 정도다. 시신들은 군복을 입고 있다. 오른쪽 바닥에 경찰 정모도 보인다. 또 다른 사진에도 파괴된 트럭 옆, 뒤로 시신들이 쓰러져 있다. 철모 두 개도 바닥에 떨어져 있다.
촬영되지 않은 2번, 3번 상판 상황은 이 사진들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이 이 사진들에 붙인 제목은 ‘학살된 애국자’가 아니다. ‘서울 한강교에서의 적의 파괴 및 국방군의 참살 장면’이다.
무슨 뜻인가. ‘북한군 자신들이 민간인 희생자를 찾지 못했거나 ‘학살’이라고 선동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는 뜻이다. 민간인 희생자가 절대다수였다면 ‘민간인 대량 학살’ 선전용으로 최고의 장면이다. 북한군이 민간인 피해를 목격했다면 촬영을 하지 않을 까닭이 없고, 사진들 제목을 ‘국방군 참살 장면’이라고 붙였을 이유가 없다. 최소한 북한은 ‘민간인 대거 희생’이라는 주장을 사진으로 부정했다.
‘민간인 대량 학살’설, 누가?
‘대량 희생’을 저서에서 처음 언급한 사람은 미국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다. 1951년 히긴스는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이 “한국군이 자기네 사람(their own men) 수백 명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히긴스, ‘WAR IN KOREA’, Double day&Company, 1951, p26) 10년 뒤 1961년 미국 군사학자 로이드 애플먼은 미군 장교들 인터뷰를 토대로 ‘사람(people) 500~800명이 폭사 혹은 익사했다’고 기록했다. 인터뷰한 사람은 라이트 대령, 하우스만 대위 등 군사고문단 장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목격자’가 아니다. 현장 상황을 보지 못한 간접 증언자들이다. 라이트는 다리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하우스만은 폭파 7분 전 이미 다리를 건너갔다.(히긴스, 앞 책, p25; 애플먼,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Army, 1961, p33)
1977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는 ‘한국전쟁사’ 1권에 ‘손실이 인원(人員) 500~800명에 이른 것으로 ‘목격자’에 의해 추산되기도 하였다’라고 서술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1, 1977, p547) 저 ‘간접 증언자’들이 ‘목격자’로 바뀌었다.
1995년 국방부가 편찬한 대중용 ‘한국전쟁’ 상권에서는 또 바뀌었다. ‘약 500~8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들’이 희생되었다.’(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上, 1995, p161) 주석에는 ‘애플먼 책과 1977년 ‘한국전쟁사’ 인용’이라고 적혀 있다.
괴담의 계보
사진으로 판단하면 500~800명은 과장이다. 차량이 빽빽하지도 않고 시신 숫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현장을 보지도 못했던 미군이 내놓은 ‘아군 수백 명 사망’이라는 추정치가 10년 뒤 ‘사람 500~800명 폭사 혹은 익사’로 바뀌었다. 16년 뒤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를 ‘목격자’ 추산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18년 뒤 국방부는 ‘사람[人員]’이라는 단어를 ‘피란민’으로 바꿔버렸다. 이렇게 아무 검증 없이 ‘아군 수백 명 사망’이 ‘민간인 500~800명 사망’으로 둔갑했다.
이게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 주장이 사실로 굳어버린 경로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를 검색하면 ‘민간인 대량 희생’이 언급된 것은 1990년대부터다. ‘피란민 가득한 다리 폭파 장면’을 연출해 내보낸 1993년 6월 20일 KBS1 방송 ‘다큐멘터리 극장’은 압권이었다. 이후 민간인 희생설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사실로 굳어져 왔다.
그러면 민간인 희생자가 없나?
지난 2월 서울시 동판 내용에 의문을 품은 한 시민이 국방부와 서울시에 사실 확인 민원을 제기했다. 원래 있던 서울시 동판 내용은 2010년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이 서울시에 보낸 ‘민간인 추념 위령탑 건립 추진’ 공문과 내용이 동일하다. 국방부가 잘못된 자기네 한국전쟁사를 근거로 민간인 위령탑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게다가 이 공문에는 엉뚱하게도 1995년 ‘한국전쟁’이 아니라 1977년 ‘한국전쟁사’1을 인용해 ‘민간인 500~800명 희생’이라고 적혀 있었다.
2월에 민원이 제기되자 그때까지 무관심했던 국방부는 자체 조사를 통해 지난 4월 ‘피해자는 민간인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고 서울시에 통보했다. 전쟁 후 국방부가 처음으로 자기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서울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이번에 동판을 교체했다.
그렇다면 민간인 피해는 전혀 없었을까?
폭파 19일 뒤인 1950년 7월 16일 용산대폭격 때 미 공군이 촬영한 사진을 보자. 한강철교부터 중지도까지 ‘육지’다. 길들과 시설물도 보인다. 육지에서 중지도로 오르는 길들도 있다. 이 지역이 2024년 5월 촬영사진에 표시된 부분이다. 지금은 강이지만 당시는 육지다. 용산 쪽 다리 입구에서 통제했다고 해도 이 개활지를 통해 중지도로 진입하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 국방부 정훈과 이창록 소위 증언은 통제선 위치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이 소위는 “(1981년 현재) 이원등 상사 동상 앞 위치에 중지도 파출소(초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폭파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이창록, ‘한강인도교 폭파’,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 1982, pp.348, 358)
이원등은 1966년 고공 낙하 훈련 중 순직한 군인이다. 그해 동상이 건립됐는데, 위치는 중지도 남쪽 첫 번째 상판 직전 도로변이었다. 지금은 건너편으로 이동돼 있다.
초소와 통제선 위치는 북한군 사진 속 첫 번째 상판 직전이라는 이야기다. 개활지를 통해 중지도에 진입해 있는 군중을 이곳에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을까?
북한군 촬영 사진을 보자. 정체가 애매한 시신이 보인다.(사진③) 웃옷과 바지 색이 다르다. 팔에는 봇짐처럼 보이는 흰 물건이 걸려 있다. 오른쪽에는 군화도 경찰화도 아닌 신발이, 왼쪽에는 벙거지가 떨어져 있다. 외형만 보면 경찰도 아니고 국군도 아니다. 특수임무를 띤 사복요원일 수도 있지만 통제선을 뚫고 진입한 민간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간인 대량 희생’은 근거가 없다. 북한군이 찍은 현장 사진이 증명한다. 하지만 미군 촬영 사진과 목격자 증언은 완전 통제가 어려웠다는 사실 또한 알려준다. 분명한 사실은 또 있다. 본인들 안전을 포기하고 중지도로 복귀해 통제선을 사수한 공병대 헌병들 덕택에 더 많은 희생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적에 의하여 학살된 애국자의 시체’ 사진묶음>
*일부 극단적으로 잔인한 장면 사진은 제외했다.
* 사진설명은 북한군이 붙인 원문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