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진솔 “클래식과 영화·게임음악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어요”

2024. 6. 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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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창조인상 받은 지휘자 진솔
제15회 홍진기창조인상 문화예술부문 수상자인 지휘자 진솔. 지난달 서울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저를 포함해 여러 여성 지휘자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여성 지휘자’가 아닌 그냥 ‘지휘자’로 인정받길 바랍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사람들은 물을 거예요. ‘그래, 당신이 남성 지휘자들과 다를 바 없는 건 알겠는데 특별한 건 뭐야. 왜 남들과 같은 수준의 당신을 굳이 봐야 하나?’ 그러니 남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세상에 없었던 존재가 되고 싶은 굉장히 발칙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홍진기창조인상 문화예술부문을 수상한 지휘자 진솔(37)의 말이다. 그가 상을 수상한 이유도 국내에 드문 여성 지휘자여서가 아니라 ‘고전음악과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젊은 혁신가’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0여년 전 비상설 앙상블(합주 단체) ‘아르티제’를 창단해 어렵기로 소문난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말러리안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면서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내 최초의 게임 음악 전문 공연 플랫폼 ‘플래직’의 대표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스타크래프트’와 ‘가디언 테일즈’ 등의 게임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공연해 게임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지난해 TV 드라마 ‘마에스트라’에서 오케스트라 총괄 자문과 주연 배우 이영애의 지휘 레슨을 담당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지휘자 진솔이 이끄는 플래직 게임 심포니 오케스트라&밴드의 ‘가디언 테일즈’ 게임 음악 콘서트 ‘심포니 테일즈’. 2022년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렸다. [사진 플래직 유튜브 채널]

클래식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정통 코스를 밟았기에 진 지휘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보는 더욱 신선하다. 부친은 작곡가인 진규영 영남대 명예교수고 모친은 소프라노 이병렬씨다. 양친은 외동딸이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고생길을 택하는 것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 거장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하는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영상을 보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가출까지 감행해 친구 집에서 입시를 준비했다. 당당히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합격해 지휘를 전공하고 독일 만하임 국립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독일 바덴바덴 필하모니, KBS 교향악단, 부천필하모닉 등을 지휘하며 경력을 쌓았다. 지난달 홍진기창조인상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진 지휘자를 만났다.

Q : 말러리안 프로젝트를 하는 이유와 말러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 “제가 말러와 만나게 된 것은 24살 때 경기 필하모닉 부지휘자 오디션을 보면서였어요. 오디션 곡이 말러 교향곡 3번이었거든요. 대부분의 지휘자들, 특히 젊은이들은 아무도 지휘를 해본 적이 없는 곡인데 오디션 곡이라니 신기할 정도였죠. 결과는 당연히 낙방이었죠. 그래도 그때 준비를 하면서 말러 교향곡 3번 전 악장을 공부한 거예요. 곡이 어렵고 규모가 방대해서 유럽에서도 사업 규모가 작은 교향악단은 엄두를 못 내는 곡입니다. 게다가 말러 교향곡은 중년 이상의 성공한 마에스트로나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요. 그런데 저는 어쩌다 보니 어린 나이에 말러를 (그중에서도 어렵다는) 3번부터 공부해 버리게 된 거예요. 깊이 만나다 보니 처음엔 어려웠지만 ‘말러라는 게 이렇게 웅장하고 깊이가 있구나’ 느꼈어요. 유학을 마무리할 즈음에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과 대화를 하면서 ‘말러가 젊은이들에게 거의 금기시되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이들의 열정을 끌어올린다면 값어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말러리안 프로젝트를 시작한 겁니다.”
2019년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말러리안 시리즈 4' 콘서트에서 말러 교향곡 6번을 지휘하는 진솔 [유튜브 캡처]

Q : 게임 음악을 할 때와 고전음악을 할 때 지휘에 차이가 있나요?
A : “고민을 많이 하는데, 일단 포맷은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클래식 레퍼토리도 당대에는 새로운 것이었는데 너무 잘 만들어져서 지금도 재현이 되는 거잖아요. 그것들의 영향이 게임 음악·영화 음악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양식과 기본기는 비슷해요. 거기에 20세기에 탄생한 비트, 미국의 팝, J팝이나 K팝, 비서구 국가의 전통적인 비트·리듬·선율 등이 듣기 좋게 섞여 있는 거죠. 기반은 클래식입니다. 제가 알기로 실용음악과에서도 바그너를 배우고 음악사도 배웁니다. 오히려 클래식 음악과에서 1900년대 이후의 것(대중음악)을 너무 안 배우고 대중과 괴리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현대 클래식 음악을 하셨는데 티켓 값이 비싸지 않은데도 손님이 안 와요. 전문가들끼리만 서로서로 들으러 가고 ‘어렵게 잘 썼다(작곡했다)’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Q : 부모님은 왜 음악하는 걸 반대하셨던 건가요?
A : “이런 것들(현대 클래식 음악)이 잘 안 풀리니까 딸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음악을 하면서 생계라도 유지하려면 교수가 돼야 하는데 그건 또 하늘의 별따기잖아요. 또 지휘를 안 하길 원했던 건 부모님 세대는 여성 지휘자가 상상이 안 되는 세대였으니까요.”

Q : 부모님이 지금은 대단히 만족하실 것 같습니다.
A : “어르신들은 본인들이 예상한 결과를 딱 해놨을 때 만족하시더라고요.(웃음) 지금 부모님 느낌은 기대하며 잔뜩 산 주식이 안 오르고 덤으로 조금 산 주식이 확 오른 느낌, 그래서 좋긴 좋은데 ‘?!’ 이런 느낌이신 것 같아요.”
드라마 '마에스트라' 주연 배우 이영애에게 지휘 지도를 하는 지휘자 진솔 [tvN 유튜브 캡처]

Q : 학창 시절 왕따와 학교폭력을 겪으면서 게임에서 위안을 얻은 것이 게임 음악 공연의 바탕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A : “고등학교에 반 1등으로 입학했는데 그것 때문에 괜히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었어요. 제가 공부하고 있으면 옆자리에서 와서 계속 작은 소리로 19금 욕을 하며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다 다 같이 (물리적으로) 덤비고 그럼 저도 지기 싫어서 같이 싸우고 그런 시기가 있었죠. 7대 1이었어요. 외롭고 힘들어서 그때 게임을 진짜 많이 했어요. 온라인상으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팀플레이를 하면서 외로움도 달래고 즐거움도 얻고 간접적이지만 사회성도 길렀어요. 그래서 저는 게임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이 있고, 한때 과몰입했던 것도 맞지만 얻은 것도 많기 때문에 게임광이었던 걸 숨기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합쳐보자’ 하는 마음으로 게임 음악 공연을 해보게 된 것이죠.”

Q : 지난해 드라마 ‘마에스트라’에 참여한 것 같은 대중문화 협업도 계속 하실 건가요.
A : “그것이 큰 경험이 되었고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철학·공학 등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일하는 경험을 향후 5년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제 사촌 오빠가 배우 이준기입니다. 저도 한때는 오빠가 연예인이지 문화예술인이라는 생각을 안 했고 오빠도 클래식 음악계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인식을 갖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예술인들 간에도 벽이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고 이걸 허물면서 같이 발전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15회 홍진기창조인상 문화예술부문 수상자인 지휘자 진솔. 지난달 서울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Q : 새로운 음악 프로젝트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A : “지금 하는 프로젝트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면서 여유가 될 때 하나씩 추가하려 합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로는 레퀴엠(위령미사곡)을 연주하는 ‘아르티제 레퀴엠 시리즈’가 있어요. 그 첫 공연인 ‘모차르트: 레퀴엠’이 오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려요.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레퀴엠이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등 유명한 것들을 시작으로 막판에는 현대 창작 레퀴엠을 연주하려고 합니다. 각 나라에 그들 특유의 슬픔의 정서가 있잖아요. 나라별로 슬픔에 대한 곡을 받고 싶어요. 저도 작곡 하나 정도는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 전세계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클래식 창작 음악 공모를 받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죠?
A : “공연명이 ‘아르티제 오버 더 클래식’인데요. 6월 28일에 오케스트라로 연주할 예정입니다. 한국의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외국 사람이 참여할까 했는데 꽤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클래식 음악 전공자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대학에서 강요하는 그런 (실험적인 현대 클래식) 음악을 강요하지 않는 게 특징입니다. 대학에서는 모두 학기마다 이런 (실험적인) 곡을 여러 개 써야 돼요. 그래서 제 주변에는 정신적으로 병이 온 친구들까지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은 조성음악(특정한 우세음이나 화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음악으로 우리에게 편하게 들리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은 모두 조성음악)이 좋은데 '조성음악을 하면 안 돼'라는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죠. 학교는 졸업해야 하니 기껏 힘들게 (무조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회에 지인들을 부르면 (일반인) 지인들이 와서 '우린 무식해서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작곡가는 거기에 상처를 받는 거죠. 그래서 이 공모는 이런 젊은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대중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곡을 보여달라는 취지입니다. 이 곡들을 모아서 게임이나 영화 제작자에게 들고 가서 에이전싱을 해서 우리의 영화 음악·게임 음악 수준을 한 차원 높이고 싶어요. 이렇게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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