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잃고 사흘간 울었다는 그곳, 백마고지가 눈앞
최전방 ‘호국보훈의 성지’ 고대산
20대의 세 여름을 보낸 곳. 십수 년이 흐른 이 여름에야 다시 왔다. 근처 부대에서 사격 훈련 중인지, 총소리가 요란했다. 다음 주 제대하는 BTS 진이 이곳을 지키는 제5보병사단 신병교육대 조교라지. 코앞이 군사분계선 남방한계선이다. 경기 북부에서도 북쪽 끄트머리. 고대산(832m)이다.
“지난달에는 열 번, 이번 달에는 처음이고요.”
지난 4일,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서 70년째 사는 김모(74)씨를 고대산 칼바위 근처에서 만났다. 김씨는 지난해 4월 교통사고로 양쪽 어깨와 왼쪽 무릎을 심하게 다쳐 두문불출했단다. 그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고대산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10여 년 전에 고대산에 한 번 온 게 전부였는데…”라고 말했다.
BTS 진이 신교대 조교인 5사단이 지켜
그래서 고대산도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었다. 1980년대 초에 등산이 허용됐다. 그러니까 김씨는 출입금지가 풀린 이후 40년간 단 1회 고대산에 올랐다가 올해 들어서만 11회로 ‘몰아치기’를 하는 것. 그는 “처음엔 다친 무릎이 시큰했는데, 점점 회복되는 게 느껴집니다. 산이 저를 살리는 것 같아요”라고 밝혔다.
고대산의 기점은 신탄리역이다. 역 뒤편에서 세 갈래 코스가 시작된다. 산 이름 ‘고대(高臺)’와 역명 ‘신탄(薪炭)’은 얽히고설켜 있다. ‘고대’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고래는 구들장 밑의 불길과 연기가 통하는 고랑을 가리킨다. 산의 골이 길고 깊다는 뜻이다. 신탄은 땔나무와 숯이다. 나무가 울창하다는 의미다.
표범폭포는 표범바위 아래 있다. 고대산 표범바위는 한탄강 지질공원 명소 18곳 중 가장 북쪽에 있다. 100m 높이에 화산활동이 빚은 무늬가 화려하다. 자연휴양림 입구에는 야구장이 있다. 2018년까지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의 홈구장이었다. 김씨는 “군사분계선에서 가장 가까운 야구장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70년째 여기서 살며 밭일하랴, 서울 공사장(철근 기술)에 일하러 나가느라 ‘뒷산’인 고대산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의 나이와 대광리에서 살아온 햇수 사이에 공백이 있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왔다는 얘기다. 김씨가 대광리에 온 건 1954년 봄. 한국전쟁 휴전 직후였다.
Q : 4살 어릴 적에 대광리에 오셨군요.
A : “예. 경북 경산에서 왔습니다. 이곳이 수복되면서 올라왔죠.”
A : “3남 2녀 중 막내였습니다. 한국전쟁 통에 아버지께서는 행방불명 되셨고요. 막막해진 어머니가 삼 형제만 키우고 누나 두 명은 일자리로 내보냈습니다. 저 앞에 백마고지와 철원평야를 되찾아 여기가 남쪽 땅이 되면서 올라온 거죠.”
백마고지(395고지)에서는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이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포탄 총 27만 4954발을 주고받았고, 12차례의 공방전 끝에 주인이 7회나 바뀌었다. 우리 군은 3500명, 중공군은 3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김일성, 철원평야 빼앗기고 큰 상실감
Q : 아버지는 어떻게든 찾아보셨습니까.
A : “아뇨.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이입니다.”
A : “이른바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머니께서는 입이라도 덜려고 했던 거죠.”
고대산 정상.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초소가 북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새만 넘나들 뿐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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