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오래 가는 어젠다의 조건
대통령이 직접 나서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으니, 세상이 들썩거리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주무 부처인 산업자원부 장관도 최대 매장 가치가 현재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라고 추산해 비산유국 국민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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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포항 석유’ 직접 브리핑
모든 이슈 집어 삼킨 어젠다 세팅
문제는 이슈의 지속 가능성 여부
시대 과제 반영해야 오래 남을 것
」
포항 앞바다의 석유 매장이 실제 확인되더라도 상업적 시추는 2035년에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아스팔트를 만들어 파는 회사인 한국석유도 주가가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포항 앞바다에 유전이 생길 수도 있다니 때를 놓칠세라 석유 글자만 들어가면 투자를 벌이는 모습이다.
대통령의 발표가 만들어 낸 이슈의 파급력은 이렇게 엄청나다.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어젠다 세팅은 미디어가 어떤 이슈를 많이 보도하면 이에 노출된 일반대중들이 해당 사안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의 언론학자 맥스웰 맥콤스와 도널드 쇼가 실증적으로 확인한 어젠다 세팅은 미디어와 여론의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처럼 언론의 어젠다는 여론 형성에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언론의 어젠다에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주체는 대통령이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행한 국정브리핑에서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사안을 언론이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온다는데. 여기에 부정적 보도나 비판 등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야권은 “지지율 만회 정치쇼” “희망 고문” “천공의 그림자”라는 표현을 동원하며 강하게 비판했지만 이마저 포항 석유 어젠다 세팅의 효과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뿐이다. 야권의 비판 또한 포항 석유 보도의 양을 늘리기 때문이다. 어젠다 세팅이 무서운 점이다.
언론의 어젠다 세팅 기능을 야간 탐조등에 비유하기도 한다. 특정 사안에 보도의 불빛을 비춰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전환해 기존에 있던 다른 사안의 중요성을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탐조등 불빛의 위치 결정에도 대통령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 언론은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내고 인터넷 공간은 들끓어 올랐으며, 석유 관련주는 상한가를 기록했다. 그러는 사이 해병대 채 상병 사건과 훈련병 사망, 그 영결식 당일의 맥주와 어퍼컷은 국민의 관심에서 조용히 밀려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처음부터 의도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만 보면 ‘포항 석유’는 블랙홀처럼 다른 이슈들을 다 빨아들였다.
문제는 어젠다 세팅의 지속성이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언론의 탐조등은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겨 갈 태세가 되어 있다. 또한 어젠다의 지속성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같은 것도 아니다. 어떤 어젠다는 단명하고 어떤 것은 장수한다. 포항 석유 어젠다가 단명에 그칠지, 장수할지는 예단할 수 없다. 시추 결과에 따라 좌우될 문제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 시대의 중요한 과제를 반영해 대중의 가슴을 때리는 어젠다일수록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이재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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