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사진으로 그린 수묵화

2024. 6. 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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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목향’ 시리즈, 2014년 ⓒ 민연식
굵고 빠르게, 붓의 배면을 사용해 단 한 번의 붓놀림으로 그린 듯한 나뭇가지. 세필로 촘촘히 그어 곧 바람에라도 나부낄 것 같은 버들가지. 또는 담묵을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여러 겹의 먹을 입힌 듯한 깊은 양감의 댓잎들. 흰 화선지에 진한 생묵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은, 그러나 사진가 민연식의 ‘사진’이다.

민연식은 주로 나무 등의 자연물을 흑과 백의 대비를 통한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로 표현해 온 작가다. 2009년 첫 사진 시리즈를 선보일 때부터 그 표현기법의 신선함으로 주목을 받은 이래, 2014년에는 새로이 겨울나무들을 소재로 한 ‘무위목향(無爲木響)’ 시리즈를 선보였다. 버드나무, 수양버들, 조릿대, 느티나무…아름답게 장식해 줄 무성한 나뭇잎이나 꽃 하나 없이 가장 안쪽의 기둥과 속 줄기만을 드러낸 채, 질감이나 색채마저 배제되고 형태만 남아있는 겨울나무들. 목향이 ‘묵향’을 떠오르게 하는 이 시리즈는 제목이 주는 연상처럼 사진이라기보다 오히려 수묵화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사진만이 담아낼 수 있는 대상 그대로의 실존감은 뚜렷하다.

언뜻 촬영 이후 책상에서 보정을 통해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나무를 중형카메라를 사용해 스트레이트기법으로 찍었을 뿐 다른 후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데 이 사진 시리즈의 묘미가 있다. 흑백사진의 흰색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만들어낸 여백이요, 검은색은 나무의 형태미가 잘 드러나는 시간대 태양 빛의 각도가 만들어낸 선이다. ‘인위를 가하지 않은 나무 향기’라는 뜻의 사진 시리즈 제목처럼, 작가는 나무 그대로의 골간을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사진의 형식을 통해 추상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무위목향’은 지난달 미국 맨해튼 ‘케이트 오(KATE OH) 갤러리’에서 선보여져 현지인들의 감탄을 자아낸 새 시리즈 ‘밤의 폭포’로 이어진다.

흐르는 시간 속에 징검돌을 놓듯 또박또박 시리즈를 완성해가는 사진가 민연식. 관자(觀者)로서 그것을 향유하는 즐거움은 우리의 몫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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