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도시, 피와 행동이 만든 도시
에리크 아장 지음
진영민 옮김
글항아리
파리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책 도입부에 인용된 발터 베냐민의 “도시라는 명칭은 위치한 곳에 따라 다른 울림을 갖는다”라는 말처럼, 파리의 경계 안은 매혹이란 단어와 동의어다. 문학, 영화, 미술, 음악, 패션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산실이자 배경이다.
프랑스 출판인이자 작가인 지은이는 ‘파리의 오랜 산책자’를 자처한다. 그는 속깊은 인문학으로 파리를 파리답게 만든 역사와 문화예술, 그리고 사람들의 체취를 찾아낸다.
낭만과 문화예술만 있다면 파리는 진열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실 파리는 인간의 피로 만든 행동의 도시다. 1789년 바스티유 봉기로 시작된 대혁명은 서막일 뿐. 부활된 군주제의 폐지를 주장한 1832년 6월 봉기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속 바리케이드 장면의 소재가 됐다. 파리의 골목을 걸으면, 이 소설 속에서 전령으로 일하다 희생된 정의로운 소년 가브로슈가 “작은 강아지라고 발로 차진 마”라고 외칠 것만 같다.
1만 5000명을 체포해 알제리로 추방하면서 파리는 다시 피의 무대가 됐다. 파리를 걷는다는 것은 자유·평등·우애로 요약되는 현대 휴머니즘 세계가 결코 무혈혁명으로 이루진 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진 것일까. 그 뒤 파리를, 특히 생라자르역을 다룬 예술작품들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1932년 주변 광장에서 물웅덩이를 건너는 사람을 포착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생라자르역 뒤쪽’이 대표적이다.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생라자르 기차역’ 도 마찬가지다. 정중동이 따로 없다.
파리는 1871년 ‘파리코뮌’의 현장이었다. 직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노동자들은 ‘세계 최초의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자치정부’로 평가받는 파리코뮌을 수립해 도시를 장악했다. 당시 파리의 벨빌 구역 주민들은 그 핵심 지지 세력이었다. 하지만 베르사유로 옮긴 제3공화국 정부는 꽃피는 5월에 17만 군대를 동원해 5만도 안 되는 시민이 방어하는 파리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6667명(일부 추정으로 2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진압군도 677명이 숨졌다.
이 책에는 지금은 거리 예술로 유명한 벨빌 구역에 대한 지은이의 각별한 애정이 묻어난다. 극장으로 출발해 두 차례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위한 영화관으로 운영되다 이제는 중국음식점으로 변한 ‘벨빌 극장’의 1900년 사진이 책의 한 면을 차지한다. 노스탤지어를 넘어 역사에 대한 지은이의 존중심이 엿보인다.
파리는 1968년 다시 세계를 뒤흔들었다. 대학가 라탱 구역에서 대학생들이 노동자와 연대해 자본주의·기술관료주의에 젖은 대학교육과 베트남전을 비판하고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구질서에 저항하는 집회·파업·시위를 벌였다. 이 68혁명은 파리와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했다. 파리는 실로 파괴적인 힘을 지녔다. 파리가 풍기는 문화예술의 향기는 이런 역사가 바탕이 된 휴머니즘의 전통이 작동한 게 아닐까.
파리는 문화예술과 동의어다. 문학가 스탕달·보들레르·아폴리네르·브르통 등이 살았거나 작품 배경으로 삼은 도시, 마네 같은 화가가 새로운 조류를 만든 근거지, 사진가 로베르 두아노가 ‘얼음으로 뒤덮인 생드니 운하’를 찍을 수 있었던 공간이라는 게 첫 이유다. 더 큰 이유는 그런 이들을 사랑하고 기억하며 반추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 아닐까.
영화 역사를 새로 쓴 누벨바그의 기수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의 첫 여배우로 활동을 시작해, 그 자신이 배우·영화감독·극작가로 거장이 된 덴마크 출신 아나 카리나의 근거지도 파리였다. 파리는 수많은 예술작품의 배경이 되면서 스스로 하나의 문화 현상이자 자유로운 인간 영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작품들에는 파리라는 고풍스런 공간이나 혁신적인 건축물을 넘어 이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고 생각하며 행동한 사람들의 살 냄새가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도시의 거리명에 정치인이나 혁명가와 더불어 문화예술인의 이름이 끝없이 등장하는 것도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줬을 것이다. 책 도입부에 적힌 “잃어버린 발자취? 그러나 발자취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앙드레 브르통의 시 구절이 귓가에 맴돈다.
문득 파리에 가고 싶어진다. 이 도시에서 여름올림픽이 열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제 L’Invention de Paris: Il n’y a pas de pas perdus(파리의 발명: 사라지는 발자취는 없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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