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이미지 저우언라이, 변절자 가족 16명 몰살 작전 지휘

2024. 6.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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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온화·냉혈 두 얼굴의 지도자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찬에서 건배를 하고있다. 중국은 오늘날 미국과 패권경쟁에도 저우의 장기잠복 정보전을 적용하고 있다. [중앙포토]
1931년 11월 중국 상하이의 일간지들은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구순장(顧顺章)의 가족·친지 16명이 집단살해된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살해방법도 총이나 칼을 쓰지 않고 밧줄로만 조용히 목숨을 끊은 수법이어서 더욱 충격을 주었다. 가장 큰 충격은 훗날 중국의 건국 지도자가 되는 저우언라이(周恩来)가 사건 주모자로 지명수배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아직도 이에 대해 반신반의한다. 온화하고 신사적인 이미지로 ‘영원한 총리’로 추앙받고 있는 저우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온화함 뒤에 숨겨진 저우의 비정함은 중국 공산당이 발간한 〈저우언라이 연보〉(1998년)와 〈스파이전쟁 역사시리즈〉(2018년) 등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물론 중국 역사가들은 저우의 비정함과 이중성을 혁명사적 관점에서 정당화했다. 출범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는 신생 공산당이 생존을 위해 변절자 구순장의 가족을 본보기로 처단한 것은 불가피했고, 그런 아픔들이 모여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변절자 많아지자 본보기로 집단 처형

정보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태동기 저우의 리더십이 여기저기서 많이 보인다. 1912년 청 왕조 멸망 이후 격동의 중국 현대사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고비마다 그의 정보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다. 앞날을 대비해 국민당 요로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놓은 저우의 정보전 전략은 열세의 공산당이 어떻게 압도적 우위의 국민당을 이길 수 있었는지 잘 말해 준다. 이러한 저우의 정보 리더십은 격동의 중국 혁명기가 낳은 시대적 산물로 구순장 일가족 몰살 사건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1931년 당시 구순장 가족 16명 집단살해 사건을 보도한 노스차이나 헤럴드(The North China Herald). [중앙포토]
1931년 4월 24일 구순장은 국민당 정보기관에 체포됐다. 그리고 체포되자마자 바로 전향했다. 이 소식을 접한 공산당 지도부는 경악했다. 구순장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공산당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 그의 변절은 당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부는 저우에게 “공산당 간부들을 안전한 곳으로 신속히 피신시키고, 구순장의 가족 친지들을 모두 제거하라”고 지시했다(〈저우언라이 연보〉 1931년 4월 24일자 기록). 만약 구순장의 변절 사실을 가족들이 알아 그들도 구순장을 따라 변절하면 당이 받을 타격이 걷잡을 수 없게 될 수 있기에 싹을 잘라야 했다. 그러잖아도 당시 국민당의 회유로 변절한 공산당 당원들이 많았고 이들의 밀고로 공산당 수뇌부가 체포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잔인하게 처단하여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공산당 홍군은 저우의 지시를 받고 구순장의 아내와 장인 장모, 처제와 이웃 친지 등 16명을 순식간에 처단했다. 저우는 혁명기 공산당 보호를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우의 정보 리더십은 중국대륙 지배를 놓고 국민당과의 일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더욱 빛났다. 먼저 국민당과의 세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보조직을 신설한 것이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상하이 쿠데타 성공으로 국민당이 대륙을 장악하자, 공산당은 세력이 위축되고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제스와 국민당의 일거수일투족을 미리 파악해 사전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저우는 1927년 11월 중국 공산당 최초의 정보기관인 중앙특별행동과(중앙특과)를 신설했다. 이듬해엔 소련 정보기관인 체카를 직접 방문해 정보수집, 적 내부 스파이 침투, 배신자 처단 등 공산혁명에 필요한 정보활동 방법을 배워 중국에 이식했다. 정보전을 비밀병기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1931년 당시 구순장 가족 16명 집단살해 사건을 보도한 신보(申報). [중앙포토]
중앙특과 설립 후에는 국민당 내부에 스파이를 직접 침투시키는 공격적 정보전을 직접 지휘했다. 특히 결정적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장기잠복 정보전을 주도면밀하게 전개했다. 국민당에 침투할 스파이들에게는 직업화, 사회화, 합법화의 3화(三化) 원칙을 유지하도록 강조했다. 공산당 스파이들은 ‘반드시 직업을 가지고, 지도층 인사 포섭을 위해 사회활동을 적극 전개하며, 이런 행위들을 모두 합법적으로 실행하라’는 지침으로 장기잠복을 위한 전술이었다. 이 중에서도 직업화를 가장 강조했다. 직업이 없으면 사회화, 합법화를 할 수 없어 장기 잠복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국민당에 침투한 공산당 스파이들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보기관인 중앙통계조사국(중통)에 무선통신전문가로 취직한 첸좡페이(錢壯飛)와 리커눙(李克農), 후디(胡底)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민당 내부 돌아가는 사정들을 속속들이 공산당 지휘부에 알렸다. 특히 첸좡페이는 앞서 설명한 구순장의 변절 사실을 공산당 지도부에 긴급히 알려 저우 등이 체포되어 처형될 수 있는 사태를 막았다.

저우의 침투정보전은 2차 국공합작 이후 더욱 불을 뿜었다. 그간 쫓기던 신세였던 공산당이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2차 국공합작이 시작되자, 국민당과 공산당간 인적 교류가 자유로워지는 등 우호적 정보여건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저우는 이 틈을 타 국민당의 당, 정, 군 요소마다 스파이를 더 많이 심어놓았다. 중일전쟁 이후 국민당과의 큰 싸움을 내다본 장기포석으로 훗날 국민당과의 마지막 일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저우의 정보전략은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국민당 장제스의 직계인 후중난 부대에 잠입한 슝샹후이(熊向暉), 천중징(陳忠經), 선젠(申健) 등은 국민당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국민당군의 작전 계획과 병력배치 등 실전 정보를 신속하게 공산당에 알렸다. 장제스의 작전명령이 국민당 군대의 일선에 하달되기 전에 마오쩌뚱과 저우가 먼저 보고 있을 정도였다. 2만여 명의 중국 공산당 군이 20만 대군의 국민당 후중난 군대와 맞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정보 덕택이었다. 국민당의 속기사로 침투해 장제스의 속기사로 승진한 선안나(沈安娜)는 13년간 잠복하면서 국민당의 주요 기밀정보를 빼냈다. 특히 여기에는 공산당을 은밀하게 해체하기 위한 국민당의 비밀회의 문서도 있었다. 〈공산당활동제한조치〉, 〈공산당처리방침〉 등이다. 공산당에게는 생사가 걸린 극비정보였다. 이처럼 저우의 용의주도한 정보전 덕택에 공산당은 국민당과 싸움에서 질 수 없을 정도로 국민당 내부를 훤히 보고 있었다.

저우의 장기 잠복 정보전 현재도 적용

정보전쟁
저우의 정보전은 행운도 따랐다. 무엇보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외세의 중국 침탈로 민생고가 심해지면서 중국 국민들의 민심이 집권당인 국민당을 떠나 공산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가만히 앉아 반사이익을 보았다. 저우는 이 같은 반(反) 국민당 민심을 이용해 공산당에 우호적인 정보협조자를 더욱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국민당 정부의 인사제도가 아직 체계화되지 않아 국민당 내에 아는 사람만 있어도 쉽게 국민당 정부에 침투할 수 있었다.

저우는 지금의 중국을 만든 건국 지도자이다. 탁월한 정보전을 통해 중국 건국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정보 지도자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당 최초로 정보조직을 만들고, 장기잠복 스파이전 등 현대 중국 정보전의 기틀을 확립했다. 또한 뛰어난 정보 전략가이기도 했다. 국민당 정부에 침투한 스파이들에게 결정적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해 결국 1948~49년 국민당과의 최후 일전에서 정보전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고, 이는 공산당 승리의 토대가 됐다. 그래서 마오쩌뚱도 저우의 정보 리더십이 공산당 승리와 중국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술회했다.

오늘날 중국은 미·중 세력경쟁이라는 더 큰 시대적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국공내전 때의 정보전 성공방식이 재현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저우의 장기잠복 정보전을 경쟁국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5년 중국계 미국인 진우타이(미국명 래리 우타이 친)가 30년간 미 중앙정보국(CIA)에 잠복해 있다가 적발된 사건이 이를 말해 준다. CIA도 2021년 중국 정보만 담당할 ‘중국미션센터’를 설치했다. 미·중 정보전이 치열해질수록 그 여파는 한반도까지 미칠 것이다. 중국은 미국에 스파이를 침투시킬 때 미국 동맹국들의 국민을 자주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래저래 우리가 미·중 정보전의 유탄을 맞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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