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성폭행 피해 여중생’을 위한 복수

김태훈 논설위원 2024. 6. 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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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성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더티 해리’는 사적인 복수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문명국 미국에서 왜 법 테두리 밖 복수가 벌어지고 세상 사람들의 공감도 얻는지를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 이야기 속에 녹였다. 시리즈 5편 중 남자 6명이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벗어나자 피해 여성이 복수에 나서는 4편은 특히 큰 박수를 받았다.

▶우리 드라마나 영화 중에서도 복수 대행업을 하는 ‘택시 드라이버’나, 죽어 마땅한 자만 골라 죽이는 살인자가 영웅으로 나오는 ‘살인자ㅇ난감’ 등이 히트하는 걸 보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인식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을 집까지 찾아가 폭행한 20대 청년이 구속되자 관련 기사에 “의인을 돕고 싶다” “후원 계좌를 알려달라”는 댓글이 쇄도했다. 귀가하던 여성을 뒤따라가 돌려차기로 공격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범인의 신상을 공개한 유튜버도 비슷한 호응을 얻었다.

▶한 유튜버가 20년 전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 신상을 연이어 폭로했다. 2004년 고등학생 44명이 여중생을 1년간 집단 성폭행한 범죄다. 가해자 중 10명만 기소돼 일부만 보호 처분을 받았을 뿐, 아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는 정신적 충격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지금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 하는데 가해자들은 대학 나오고 취직도 하며 멀쩡히 지낸다는 사실이 공분을 샀다.

▶화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적 제재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사법 체계는 사적 제재를 금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고려 시대에, 사적 복수를 허용했더니 “억울해서 복수했다”며 저마다 정당성을 주장하는 등 폭력 사태가 만연해 개인적 복수를 다시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도 이런저런 부작용을 빚는다. 이번 가해자 폭로 건만 해도 사건과 무관한 여성이 가해자의 여자 친구로 지목돼 곤욕을 치렀다. 유튜버가 피해자에게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 구제보다 유튜브 구독자 늘리기에 사회적 공분을 써먹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법으로 유명하지만, 방점은 보복 조장이 아니라 국가가 복수를 대신해 줌으로써 더 큰 혼란을 막는 데 있었다. 수천 년 전에도 알던 이치가 지금도 흔들리는 것은 법이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충분한 단죄나 사법 처리 지연이 사적 제재라는 퇴행을 부른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로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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