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련, 분도빌딩서 현판식…“민주화·통일 주춧돌 놓았다”

고경태 기자 2024. 6. 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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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민주항쟁 37돌 앞두고
옛 자리 분도빌딩서 현판식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분도빌딩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7주년 기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현판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우리는 이곳에서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의 주춧돌을 놓았다.”

군사독재가 영원할 것 같던 민주주의 암흑기에 민주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옛 사무실 자리에 과거 역사를 기리는 동판이 설치됐다. 당시 중앙위원과 활동가로 조직을 이끌었던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민통련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주의 위기 시대에 희망을 만들어가자고 다짐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1가 54-1 분도빌딩에서 ‘6·10민주항쟁 37주년 기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현판 제막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대 이사장을 지낸 함세웅 신부(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박현동 아빠스 성베네딕도회 본원장 신부, 윤순녀 평화의샘 이사장, 장영달 전 의원, 양성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정환 시인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서울 중구 장충동 1가 54-1 분도빌딩 1층에 새겨진 기념 동판. 고경태 기자

분도빌딩(당시 분도회관)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이 운영하던 곳으로, 민통련은 1985년 3월부터 1986년 11월 경찰에 의해 강제폐쇄될 때까지 이곳 4층에 입주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경찰의 방해로 사무실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톨릭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당시 27개 전국·부문 운동단체가 속해 있던 민통련은 1987년 6·10항쟁 당시 정당을 포함해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가 함께 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분도회관에서는 재야 민주화운동 인사는 물론 노동·종교·문화·여성·농민 등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활발한 논의를 펼치고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를 도모했다고 한다.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민주화의 ‘민’자만 꺼내도 잡아가던 전두환 정권 시절, 민통련이 중심이 돼서 집회와 시위를 하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켜 그 힘으로 6.10항쟁까지 갔다. 그 출발이 민통련이었는데,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자리가 바로 그곳이라는 흔적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무자들에게 조사를 시켰다”며 “앞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전민련, 민청련 자리 등 주요 사적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겠다”고 말했다.

1985년 12월9일 민통련 제2차 중앙위원회를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문익환 의장(앉은 이 왼쪽 세 번째), 계훈제 부의장(앉은 이 왼쪽 두 번째) 등이 보인다. 뒷줄 오른쪽 세 번째가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고 맨 왼쪽은 이창복 전 의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분도빌딩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7주년 기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현판 제막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네번째부터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함세웅 신부, 박현동 아빠스 성베네딕도회 본원장 신부,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장영달 전 의원.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민통련 중앙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은 당시 베네딕도 수도회 신부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분들의 결단이 없었다면 민통련은 분도회관에 입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민중의 소리’ 등 민통련 간행물도 모두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회 인쇄소에서 찍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당시 5·3인천항쟁(1986년) 등이 터졌을 때 대신 감옥 가고 다 뒤집어쓰는 역할을 한 게 민통련이다. 그래서 역적으로 몰리고 탄압받았지만 그 힘으로 6·10항쟁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당시 노동사목연구소에서 일하며 민통련 활동에 참여했던 윤순녀 평화의샘 이사장은 “(사무총장이었던)이창복 선생이 제 이름을 도용해 분도빌딩 임대계약을 했다고 하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경찰 감시가 심해 점심에 식당에 가기도 힘들어 근처 텃밭에 상추, 쑥갓을 키워 문익환 목사님, 계훈제 선생님과 점심을 먹던 추억이 새롭다. 80년대는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한 시대였다”고 말했다.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분도빌딩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7주년 기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현판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최근의 민주주의 상황에 대한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왔다. 함세웅 신부는 “민통련은 당시 이곳에서 모든 민주화단체를 총망라해 민족통일과 민주화 운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데 큰 뜻이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결딴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민통련 사무차장을 지낸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도 “지난날 민주화와 민족통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가 온몸을 다해 노력했는데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며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민통련 정신을 잘 이어서 민주화와 통일, 민중주체의 세상을 함께 소망해나갔으면 한다”고 했다.

행사를 주최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01년 출범해 국가기념일인 6·10 민주항쟁 기념식 개최를 포함하여 민주화운동 정신 계승사업, 민주화운동 관련 사료 수집 사업 등의 과제를 수행하는 행정안전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법은 1960년 2·28대구민주화운동, 6·3한일회담반대운동, 5·3민주항쟁, 6·10항쟁 등 11개를 민주화운동으로 공식인정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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