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⑫] 생전 딱 한 번 하고픈 말 “여보!! 내일부터 출근이야”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열한 번째 글은 이종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전 대우자동차 회장)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① 해직과 굴절된 삶 : 김동현 동아투위 부위원장
② 검찰공화국 시대를 사는 아이러니 : 신홍범 조선투위 위원
③ 흑산도 특종의 인연 : 윤석봉 동아투위 위원
④ 동아·조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⑤ 해직자의 낙인,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들'보다 나았다 : 김학천 동아투위 위원
⑥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거리 위 언론인의 노래 :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⑦ 이근안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
⑧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고 싶다 : 권영자 동아투위 전 위원장
⑨ 80년 수습, 오늘도 세상 구경하며 산다 : 박순철 동아투위 위원
⑩ 이제는 모두의 깃발이 된 '자유언론실천선언' : 이영록 통아투위 위원
⑪ 새 언론에 담은 유산 "권력·관행과 결별하라" : 성한표 조선투위 위원장
⑫ 생전 딱 한 번 하고픈 말 “여보!! 내일부터 출근이야” : 이종대 동아투위 위원
동아 투위 위원들의 부음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빈소에 들어서는 조문객의 눈길이 멈추는 곳. 영정 속 고인의 표정. 고인은 검은 상복의 미망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 뿐이다. 끝내 발음이 안 되는 그 말. “여보!! 나 내일부터 출근이야”
생전에 딱 한 번 이 말을 건네며 폼 잡고 싶었던 고인들, 그리고 생존자들. 그래서 그들은 해마다 3월이면 광화문 거리에 모여 목청껏 외친다. 그들을 쫓아낸 동아일보를 향해, 그리고 무도했던 공권력을 향해.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해직기자가 노동자 대량해고의 주역이 된 아이러니
젊은 날 권언 합작의 만행으로 해고의 아픔을 ‘만끽한’ 내가 동가식서가숙 끝에 찾아든 자리가 하필이면 무자비한 대량 해고의 주역인 회사였을까. IMF 사태의 절정기에 대우자동차는 격랑의 한복판에서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회사의 경영책임을 내가 덥석 떠안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련한 일이었다.
취임 직후 회사는 부도와 함께 존폐 위기에 빠져들었다. 밀린 임금이 두 달 치에 이르렀고 회사의 제품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누가 퍼뜨렸는지 대우차 사면 AS를 못 받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부 해외 딜러들은 재고로 보유 중인 대우차를 한국으로 도로 실어가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문 닫기 직전의 경영난에 몰린 부품 업체 사장들의 방문과 전화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하나같이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품 대금을 제때에 갚지 못한 모기업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 준 금융 기관들은 채무기업의 생사 여부를 가늠하며 떼일 돈이 몇 조 원일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경영의 혼란 상태가 장기화하면서 스스로 퇴사하는 사원들도 늘어났다. 일부는 택시 기사직 또는 갖가지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회사 안팎에 몰아닥치는 위기의 징후들은 신속하고 과감한 회생 대책을 강요하고 있었다. 더구나 대우차 사태의 빠른 극복은 IMF 위기 극복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맞닿아 있었다. 이 때문에 매스컴은 거의 매일 대우차 기사를 실었다.
법원 관리를 받으며 회사는 구조조정 계획을 빠르고 강력하게 실천해나갔다. 한순간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인력 감축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도난 지 석 달 만에 회사를 떠난 사원수는 8,500 명, 전체 사원의 40%에 육박했다. 이중 1,750명은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들이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해고였다.
노동자들의 반발과 저항도 그만큼 치열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결성된 공동투쟁본부(공투본)는 부평공장에 진을 치고 ‘정리해고 분쇄’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한동안 회사 주변의 대로는 시위 노동자들과 진압 경찰 간의 충돌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나의 바지 주머니에도 늘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이 무렵 어느 날 점심시간에 길거리에 나섰다가 불의의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다. 식당 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을 지날 무렵 길 건너편에서 갑자기 돌멩이들이 날아든 것. 함께 걷던 직원들이 잽싸게 나를 에워싸며 보호 장벽을 쳤다. 돌 세례는 2~3분 만에 저절로 멈췄고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돌을 던진 것은 10여 명의 해고자들이었다. 오후에 사무실을 찾아온 한 임원은 그들의 명단을 파악했다면서 경찰에 알릴까를 물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떤 심정일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순간 ‘김상만’(전 동아일보 회장)이라는 이름 석 자가 뇌리를 스쳐갔다. 내 손안에 돌멩이가 쥐어져 있는 듯한 착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오랜 세월 내 바지 주머니에는 늘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돌’을 저쪽을 향해 던지고 또 던졌던가.
공투본의 투쟁이 격화하면서 일부 노조 간부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현장에서 투쟁을 지휘했던 민노총 간부 한 사람도 구속자 명단에 올랐다.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바로 차를 돌려 안양구치소로 달려갔다. 구멍 뚫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주고받는 7분짜리 일반면회. 그는 면회실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자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서로 안부를 묻고 잠깐 침묵이 흐른 다음 그는 내게 부탁할 말이 있다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열흘 후에 재판이 열리는데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쓴 탄원서를 재판장에게 제출하면 집행유예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나는 바로 수락했고 그는 부인을 내 사무실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와 나는 서로 반대되는 각자의 직무를 열심히 수행했을 뿐인데 그는 담장 안쪽에, 나는 바깥쪽에 있었다.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가슴을 스쳤다. 극단적 대치관계 속에서 그와 나는 예리하게 충돌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우차 사태의 바람직한 결말을 위해 크게 기여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내가 퇴임한 후의 일이겠지만 인수합병 절차가 순조롭게 끝나고 경영이 호전되면 인력 수요도 늘어날 것이다.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는 단계가 오면 누구보다 해고자들에게 최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사태의 순차적이고 바람직한 진행과정을 그려보면서 나는 제법 야무진 기대를 품고 있었다. 내가 면회한 노동운동가의 경륜은 그 같은 전개의 마지막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2주일쯤이 지난 뒤였다. 여의도의 조그만 대중식당. 나는 그의 석방을 축하했고 그는 탄원서 덕분이라고 감사했다. 수천 명을 감원시킨 구조조정 기업의 경영자는 이날 저녁 뜻밖의 식사 대접에다 넥타이 선물까지 받았다. 그는 부인이 그리 시켰다고 귀띔했다. 이날 밤 귀가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무거웠다.
해직 기자가 품은 한마디의 말,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다
쟁쟁한 대기업들의 부도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국가 경제 전체가 휘청거렸다. 고용불안은 극에 달했다. 해고된 노동자가 새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비록 부도난 기업일지라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해고자들의 전직 창업과 궁극적으로 복직까지 내다보는 일련의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했다. 이 난제는 한낱 부도기업 경영자의 업무범위와 능력을 훌쩍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맨 먼저 할 일은 긴박한 회사 사정을 널리 투명하게 알리는 것. 이럴 땐 이실직고가 상책.
4개의 일간지에 광고를 실었다. 광고 문안 한 자 한 자를 내가 직접 꼼꼼히 살폈다. 사과의 뜻을 첫 줄에 담았다. “대규모 인력 조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퇴직 사원과 그 가족들께도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긴 했지만 퇴직자들의 취업 알선과 직업훈련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경영 정상화 노력에만 쏟아부어도 모자랄 경영 자원을 대량 해고의 사후 대책에 전용하는 사례는 퍽 드문 일이었다. 채권단의 눈치를 보면서 별도의 사무실을 회사 밖에 차리고 얼마간의 예산과 인원을 배치했다.
나는 거기에 ‘희망센터’라는 간판을 달았고 해고 노동자들은 이곳을 ‘절망센터'라 불렀다. 출범 직후부터 그들은 사무실 앞거리에 모여 거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노동계의 명망 있는 지도자 한 분을 만나 이 신설 기구의 운영을 총 지휘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동안 쌓아온 그의 명성에 누가 될지도 모를 자리를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노동부와 산자부 장관실, 인천시장실을 찾아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도움을 청하고 경총과 전경련에도 대우차 퇴직자를 위한 업계의 일자리 나누기를 호소했다. 유사 직종의 2만여 개 업체에 호소문을 보내 사원 모집 때 대우차 해고자 1명만 뽑아달라고 간청했다. 채용 박람회, 창업교육을 비롯한 별의별 사업들이 펼쳐졌다. 운이 좋아 앞으로 복직이 된다 해도 제법 긴 시일이 걸릴 것이므로 그때까지 안 굶고 버티는 방안도 백방으로 찾아봐야 했다.
이토록 절박한 현실을 감안, 여성 중심의 별도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반찬가게, 벽지 바르기, 제과 제빵 등 일곱 과목에 퇴직자 부인 200여 명이 참여했다. 한여름 10주간의 연수가 끝나는 날 간소한 수료식이 열렸다. 이날 나는 그들 앞에 서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좋은 날이 분명 오고야 말테니까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견디자고 격려했다.
“여러분 절대 기죽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젊고 앞날은 창창합니다.” 암울하던 시절 김수환 추기경이 동아투위 위원들을 성당에 불러 모아 들려주신 말씀. 평생 귀에 쟁쟁하다.
졸지에 직장을 잃고 살림살이가 절망적으로 궁색해지자 새 일터를 찾는 퇴직자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희망(절망)센터’의 이용자와 채용박람회 참가자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언제 무릎 꿇고 사죄하는 사주를 볼 수 있나
제1차 채용박람회가 열린 것은 대량 감원 두 달 뒤인 2001년 4월. 회사와 노동부 인천광역시의 공동 주최로 열린 이 행사에는 7천여 명의 구직자가 모였고 그중 1,500명이 대우차 퇴직자였다. 사원 채용을 위해 나선 기업은 300개. 나는 인천시립체육관의 박람회 현장을 찾아가 전직 사원 한 사람을 만났다. 면접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다가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사과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뜻밖에도 이 짧은 만남을 포착하여 기사화한 신문은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었다. 쫓겨난 자와 쫓아낸 자가 얼굴을 맞댄 사진이 1면에 크게 실려 있었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큰 글씨의 사진 설명 제목. “자신이 해고한 노동자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최고경영자”
의자에 앉은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몸을 약간 구부린 것인데 사진에는 정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구직의 대열은 끝이 없었다. 한 편에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건지자, 그들의 지옥 탈출을 하루라도 앞당기자는 손길이 이어졌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한강물을 바가지로 퍼내는 격이었다. 광풍의 한 해가 저물 무렵 ‘희망센터’는 300일의 활동을 정리한 보고서를 냈다.
취업과 창업의 성공 사례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절망 속에서 부둥키는 사람들의 체온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훗날 유사한 위기에 빠진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얼마간의 참고가 될 것 같았다. 260쪽 보고서의 제목을 정하는 데 꽤 공을 들였다.
“여보!! 내일부터 출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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