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원로 '시인'들의 귀환 [책과 세상]
김용택 '그때가 배고프지 않은 지금이었으면'
한결같은 무구함으로 쓴 삶과 앎에 대한 통찰
원로(元老).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하여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는 경외심을 담은 단어이지만, 그렇기에 선뜻 다가갈 수는 없다. 각각 66년과 42년의 시력을 지닌 원로 시인, 황동규(86) 김용택(76)이 여름의 초입에 나란히 낸 새 시집 '봄비를 맞다'와 '그때가 배고프지 않은 지금이었으면'을 마주한 기분도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레 두려워하며 문학이 아닌 외경의 자리에 두기에는 두 시인이 한결같은 무구함으로 써 내린 시어가 값지다. 이들의 귀환은 원로보다는 '시인'에 방점이 찍힌다.
황동규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 갑작스런 봄비 속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네"라고 읊조리며 시작하는 표제작처럼 황 시인의 시집 '봄비를 맞다'는 시인의 말처럼 "늙음의 바닥"을 가늠하게 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지인들에게 쓰기를 즐겼던 시인의 편지 수취인은 이미 고인이 됐고,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는 가뜩이나 가까운 죽음의 존재를 근경으로 끌어당긴다.
이처럼 죽음이 일상에 스며든 가운데 살아가는 시인은 연륜에 근거한 깨달음을 묻고 답하지만, 그 각성은 마냥 비장하거나 엄숙하지 않다. 삶의 애착을 다독이는 긍정에 가깝다.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 바로 눈앞에서 /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그래 맞다. 이 세상에 /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 정신이 싸아했지."('봄비를 맞다')라고 말하듯이. 황 시인이 미리 밝혔듯 시집의 시 태반이 그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한 인간의 기록"이다.
미수(米壽)를 목전에 둔 시인의 시선은 작고 여린 것을 향한다. "산책길에 죽은 참새"에게서 보는 "발가락의 생흙"이나 "탁자에 넘친 물"을 절묘하게 막아 내고 있는 "떨어진 꽃잎 하나" 같이 미미하나 저마다의 생명력을 지닌 존재와의 대면은 고스란히 삶의 긍정으로 옮겨 간다. 이는 "누구나 열망하나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와 다감함"(장경렬 문학평론가)을 자아낸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들려온 후배의 아내상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 마스크 꺼내 쓰고 집을 나선 내가 반갑다"며 결국 다정함으로 향하는 마음이다.
시집의 마지막 시('뒤풀이 자리에서')에서 시인은 '돌아가실 때 하실 말씀을 준비했나'라고 묻는 기자에게 답한다. "살아 있는 게 아직 유혹일 때 갑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권태가 아닌 유혹을 보는 이가 빚어내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쨍하다."
김용택 "일상이 일러주는 말, 시였다"
'옥정댁, 서춘 할아버지 느티나무, 암재 할머니, 탐리 양반, 얌쇠 양반, 아롱이 양반, 사구실댁, 빠꾸 하나씨, 이울 양반, 큰당숙, 일촌 어른….' 김 시인이 시집 '그때가 배고프지 않은 지금이었으면'에서 불러낸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 사람들이다. 그가 태어나 평생을 산 섬진강 자락의 진메마을 사람들은 그 자체로 '김용택 시'의 진경이다.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며 같이 먹고 일하면서 노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일러주는 말을 나는 받아 적었다. 시였다"는 시인의 말 그대로다.
40여 년간 시와 산문으로 자신의 고향을 쓴 김 시인이지만, 이 고향은 그만의 소유가 아닌 타지에서 살아가는 모두의 근원이다. "찔레꽃 향기가 / 코끝을 스친다. / 먼 고향으로부터 배가 고파온다"('서울4')처럼. 김 시인은 "이 시집을 내면서 비로소 나는 우리나라 어떤 한 마을을 완성하였구나, 하는 안도감을 얻었다"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고향이 시인의 시에서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표제작이자 산문 '그때가 배고프지 않은 지금이었으면' 속 한창 때는 서른다섯 가구가 살았으나 이제는 스무 명 남짓이 남은 진메마을의 정경이 쓸쓸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도 이런 안도를 전한다. "…(전략) 세월이 사람들을 마을로 데려다주고 다른 세월이 와서 그들을 뒷산으로 데려가버린다. 사는 일이 바람 같구나. 나도 어느 날 훌쩍 그들을 따라갈 것이다. 그들이 저세상 어느 산골, 우리 마을 닮은 강가에 모여 마을을 만들어 살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그 마을에 들어가 그때는 시 안 쓰고 그냥 얌쇠 양반처럼 해와 달이 시키는 대로 농사일 하면서 근면 성실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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