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회복’ 위해 오물풍선 주도한 김여정…탈북민단체의 ‘대북 전단’ 역풍 맞았다
北, 화생방전 가정해 ‘그림자 전쟁’ 벌였나…“정부 선제 대응했어야” 지적도
(시사저널=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북한의 오물풍선이 역풍을 맞았다.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박상학 대표는 6월6일 이른 시간 애드벌룬 10개를 이용해 대북 전단 20만 장을 살포했다고 공개했다. 그 안에는 임영웅 노래 USB도 들어있다고 한다. 우리 군도 같은 날 탈북민단체가 경기도 접경지역에서 살포한 '대북 풍선'이 북한 상공으로 넘어간 것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탈북민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유관기관 간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상황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북 전단 살포는 북한의 오물풍선 살포의 맞대응 성격이 강하다.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포인트는 이번 대북 전단 살포를 김여정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권력 중심부를 누비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현송월과 달리 김여정의 모습은 요즘 좀체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오빠 김정은의 후광을 업고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장과 트럼프와의 싱가포르·하노이 대면 현장을 누비던 것과는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중앙간부학교 개교식에서도 김여정은 공식 수행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먼발치에서 오빠를 지켜보는 모습이 이따금 조선중앙TV 화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이런 김여정이 목소리를 높이며 "나 아직 죽지 않았다"는 톤으로 나서는 일이 있다. 바로 대남 비방에 무게를 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른바 '담화'를 관영 선전매체로 발표하는 경우다. 최근 대한민국뿐 아니라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대남 오물풍선' 사태에서도 김여정이 선봉에 섰다.
북한이 5월28일 밤에 띄운 오물풍선으로 우리 내부가 떠들썩해지자 김여정은 이튿날 뜬금없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나섰다. 오물풍선이 북한 주민들의 표현의 자유일 뿐이며 "이를 제지하는 데 한계점이 있으니 대한민국 정부에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는 비야냥이다. 자신들의 오물 살포가 대북 전단에 대한 맞대응이란 점을 내세우고, 민간단체의 '표현의 자유'에 해당돼 우리 정부가 제지할 수 없다고 했던 점을 꼬집은 것이다.
김여정은 "께끈한(더러운) 오물짝들을 주우면서 그것이 얼마나 기분 더럽고 피곤한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란 말도 했다. 북한이 그동안 남북회담 석상 등에서 "대북 전단 수거에 적지 않은 공력(노동력)이 든다"고 하소연해 왔던 점을 오물풍선으로 앙갚음하겠다는 의미다. 또 "앞으로 한국 것들이 우리에게 살포하는 오물량의 몇십 배로 건당 대응할 것"이란 점도 강조했다. 오물풍선 '보복'을 위협하며 한국 정부나 군 당국이 대북 전단 살포를 제지해 줬으면 하는 압박으로 분석되는 대목이다.
북한 발표에 따르면 5월28일 밤부터 6월2일 새벽까지 3500개 기구(풍선)를 이용해 휴지와 쓰레기 15톤이 남쪽을 향해 띄워졌다. 주로 접경지역과 수도권에 뿌렸다는 게 김강일 국방성 부상의 6월2일자 담화 내용이다. 우리 군 합동참모본부가 집계한 걸 토대로 하면 북한이 날려보냈다고 주장하는 오물풍선 가운데 30%가량이 식별·신고 가능한 주거지나 농경지 등에 떨어졌다는 얘기다.
오물 테러 성격의 북한 대남 풍선 부양에는 적지 않은 인적·물적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란 게 우리 대북 부처와 탈북 인사들의 귀띔이다. 북한의 실정에서 대형 풍선 등 살포 기구를 다량으로 준비하거나 헬륨가스를 주입하는 데도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바람을 타고 넘어온 풍선이 목표지점에서 터질 수 있도록 타이머와 기폭장치 등을 장착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얘기다. 오랜 기간 동안 대북 전단을 살포해온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는 "북한이 김정은 비판 전단에 백배의 오물풍선으로 보복하겠다고 허풍을 떨지만 그럴 힘, 즉 재력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오물풍선을 다량 살포하면서도 주민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모양새다. 대외용 선전매체인 조선중앙통신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거나 대남 비방을 퍼부을 뿐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 등 주민들이 접할 수 있는 쪽으로는 함구하고 있다. 자칫 이런 소식이 내부에 번질 경우 대북 전단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오물풍선 대응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6월부터 한반도 바람, 남에서 북으로 바뀌어
대북 정보 관계자는 "북한은 전방지역 부대와 군인을 동원해 오물풍선 살포 작전을 펼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배 보복' 운운하지만 향후 오물풍선 숫자를 크게 늘리거나 빈번하게 날려보내기에는 엄청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윤석열 정부의 대북 대응도 김정은·여정 남매의 고민을 깊게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에는 대북 전단 단체를 경찰을 동원해 원천 차단하거나 아예 전단금지법을 만들어 북한의 비위를 맞추는 듯한 양상을 보였지만 이젠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것이다. 통일부는 오물풍선 사태 이후에도 대북 전단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면서 이를 막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전단금지법을 같은 이유로 위헌 판결한 점을 존중한다는 취지라는 설명이다.
북한으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대목이 최전방지역의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움직임이다. 김여정이나 군부는 오물풍선 살포 이후 '잠정 중단'을 밝히면 윤석열 정부가 더 이상 사태를 확전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란 얄팍한 계산을 했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확성기 방송을 배제하지 않은 대북 대응을 밝힌 데 이어 2018년 9월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9·19 군사합의를 전면 백지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국무회의 의결까지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다. 북한의 풍선이 단순한 오물 투척 수준을 넘어 우리 국민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고 항공기 운항에 지장을 초래하는 안보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GPS 교란을 통해 항공기와 선박 운항에 위험을 부르는 도발적 상황까지 전개했다.
무엇보다 오물풍선이 방사능 물질이나 탄저균 등 화생방 공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과 국민 우려가 반영된 대북 조치다.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은 6월4일 언론 인터뷰에서 "이번 오물 투척은 북한의 생화학부대가 동원돼 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유사시 화생방전을 가정해 북한이 '그림자 전쟁'을 벌인 것이란 해석이다. 수도권 도달 전에 요격하는 등 군 당국이 좀 더 선제적으로 대응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문제는 6월부터 한반도 바람의 방향이 남측에서 북으로 부는 쪽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북한 민주화 단체들은 오물 투척에 대한 김정은의 사과가 없으면 남풍에 맞춰 대북 전단을 대량 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여기에는 가수 임영웅의 노래를 담은 USB와 1달러 지폐, 생활용품 등이 포함돼 뿌려지게 된다. 1달러는 우리에게 푼돈일 수 있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평균 월급 3000원의 2배가 넘는 금액이다.
특히 군 당국과 대북 정보 당국이 전단 살포를 은밀히 돕거나 직접 나설 경우 북한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정확하기로 이름난 공군기상대의 작전 기상정보를 바탕으로 정밀한 타이머를 장착해 풍선을 띄울 경우 김정은 집무실 부근이나 김일성동상 등 평양 시내에 집중적으로 체제 비판 전단이나 한국 영화·드라마가 담긴 USB를 다량 투하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 지도부엔 악몽이고, 자칫 오물풍선에 대한 문책론이 나올 수 있다.
고성능 대북 확성기는 피하고 싶은 北
여기에 고성능 대북 확성기 방송까지 가세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대북 방송에 관여해온 전직 군 관계자는 "첨단기술을 갖춘 우리 확성기는 최대 20km까지 또렷하게 소리가 전달되는데 북한은 2~3km에 불과하다"며 "대북 방송 시 북한 확성기가 우리를 향하는 게 아니라 북한 군부대나 주민 쪽을 향해 출력을 높여 방해 방송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평양에서 전달받는 것보다 훨씬 정확한 일기예보가 나오는 확성기 방송에 북한 군인들이 귀를 떼기 힘들다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북한도 오물풍선 도발을 준비하면서 치밀한 대응 시나리오를 챙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평양 중심부에 대북 전단이 뿌려져 김정은에 대한 비난을 자초하거나 주민이나 전방 군인이 한국의 발전상을 깨닫는 상황이 되면 북한 입장에서는 무척 곤란하다. 벌집을 잘못 건드린 형국이 되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2015년 8월 목함지뢰 도발을 했다가 박근혜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자 꼬리를 내려 유감을 표명하는 굴욕을 맛본 적이 있다.
이번 도발을 기획·집행한 것으로 보이는 김여정은 벼랑 끝에 선 형국으로 보인다. 그는 2022년 11월 조카 김주애가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권력의 전면에서 밀려났다. 오빠의 유고 시 후계지위를 넘겨받을 것으로 예상된 적도 있었지만 이젠 '김주애 후계론'이 대세인 듯하다. 오물풍선으로 윤석열 정부를 궁지에 몰아 김정은의 신임을 회복하려던 권토중래 구상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문재인과 외교안보 핵심 참모들의 조언에 따랐다가 하노이에서 트럼프에게 굴욕을 맛본 김정은은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며 분풀이를 해댔고, 결국 2020년 6월엔 김여정 주도로 개성공단 내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을 백주에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관성으로 이번엔 오물풍선을 날렸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윤석열 정부와의 피하기 어려운 진검승부를 맞이한 평양 남매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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