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 기억한다면 존재하는 것이다[살며 생각하며]

2024. 6. 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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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장, 영화평론가, 前 숙명여대 교수
영화가 현실을 모사하던 시대서
현실이 영화를 모사하는 시대로
죽은 사람의 데이터 AI로 복원
사람과 화상통화하는 ‘원더랜드’
죽음을 기억으로 넘어서는 서사
기억은 ‘관계’를 살아있게 한다

영화가 현실을 모사하던 시대에서 현실이 영화를 모사하는 시대가 됐다.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지던 영화 속 삶을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현실에서 가까이 체감할 수 있게 됐다.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하버드대 AI 관련 공학자들에게 자문해 만들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구현한 세계가 이제는 꿈의 세계가 아니게 된 것이다. ‘그녀’(2014) 같은 영화에서는 AI 체계와 인간과의 교감이 사랑의 감정까지 교류하는 상황을 보여주었고, 현실에서도 AI와 대화가 이젠 낯설지 않다.

국내에도 AI 기술이 구현하는 새로운 세계가 상용화한 삶에 대한 영화가 등장했다. 김태용 감독의 신작 ‘원더랜드’는 카이스트(KAIST) 뇌과학 전문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AI 기술이 구현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의 데이터를 AI로 복원해 현실 세계 사람들과의 화상통화를 가능하게 만든 서비스로, 평소 영상통화를 자주 사용하던 김 감독이 화면 너머의 사람이 실재하는지 의문을 가지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존재하는 것일까. 영화 ‘러브 레터’를 만든 일본의 이와이 슌지(巖井俊二)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죽은 연인의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주인공의 심경을 그리게 된 이유를 “기억이 지속된다면 죽어도 진짜 죽은 게 아닐 수 있겠다 싶었지요.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존재 의미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보다 기억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라고 한 바 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한다면 기억 때문이다. 기억하고 있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볍게 넘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원더랜드’에서는 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 죽은 존재를 기억만이 아니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 서비스가 제공되는 세계에 대한 다층적인 접근을 한다.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한 ‘바이리’(탕웨이)와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남자친구 ‘태주’(박보검)를 ‘원더랜드’에서 우주인으로 복원해 일상을 나누는 ‘정인’(수지) 등 여러 의뢰인의 상황이 제시된다. 어린 시절부터 AI 부모와 교감해온 ‘원더랜드’의 수석 플래너 ‘해리’(정유미)와 의뢰받은 서비스에서 뜻밖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신입 플래너 ‘현수’(최우식)의 상황도 드러난다. 또한, ‘원더랜드’ 서비스 내에서 AI로 구현된 사람들을 모니터링 하는 ‘성준’(공유)은 같은 AI지만 그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서사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서비스 오류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는 딸의 실종을 걱정하는 AI 바이리의 애정 과잉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강한 모성이 기계적인 한계를 뚫고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 서비스의 장단점 또한 이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어느 날 의식불명 상태의 ‘태주’가 기적적으로 깨어나 ‘정인’ 곁으로 돌아오자, ‘원더랜드’ 속 ‘태주’와 현실에 돌아온 ‘태주’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정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간직하려는 이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김초엽의 단편소설 ‘관내 분실’은 마인드 업로딩 장치를 통해 사망 후에 도서관의 데이터가 정리되는 것이 일상화한 시대에 문득 도서관에서 검색되지 않는 엄마를 찾으려던 주인공 지민이 관내 분실된 엄마를 애써 복원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인드에 접속하면 실제 모습과 너무 닮아서 섬뜩해진 가족 중 한 명이 인덱스를 삭제해 접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인드 도서관에서도 ‘관내 분실’이 된 오류는 처음 발생한 상황이어서 기술적으로 많은 고민이 따른다. 생존 때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민이지만, 막상 마인드가 분실된 후에 엄마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우리는 사라진 뒤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화상통화든 도서관 마인드 업로딩 장치든 죽음을 기억으로 넘어서려는 서사는 인간관계에 있어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살아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사람에 대한 사소한 기억들, 평범하게 반복된 일상 속 소중한 기억이 바로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 왔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기억의 복원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면 진시황이 꿈꾸었던 불로장생의 또다른 현대적 구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의는 호모 메멘토스(Homo Mementos)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변용해서 정의될 법도 하다. 기억이 바로 존재의 실감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절대로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원더랜드’ 속 상황이 조만간 우리에게 다가와 일상화할 날이 올 것이다. 눈에 보이는, 눈앞에 놓인 현실적 상황과 현재만이 중요한 실용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죽은 이를 기억이라는 데이터로 곁에 두게 하는 서비스는 역설적으로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장, 영화평론가, 前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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