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박정희 대통령 당하는 것 목격, 제정신 아니었다”

이선명 기자 2024. 6. 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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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심수봉. tvN 방송화면



가수 심수봉이 1979년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4년간 방송 활동 금지를 당해야 했던 사연을 털어놨다.

심수봉은 지난 6일 방송된 tvN STORY 예능 프로그램 ‘지금, 이 순간’에 출연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당한 사실을 밝혔다.

이날 방송에서 심수봉은 “굉장히 제 노래를 좋아해주시고 따뜻하게 잘 해주셨으니 인간적으로 귀하게 생각되는 분이었다”며 “그 분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저는 그때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어떻게 그런 자리에 제가 있어서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을 받기도 하고 참 슬펐다”며 “많이 슬픈 시간들이었다”고 했다.

심수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방송 활동을 금지해야 했다. 그는 과거 한 예토크쇼에 출연해서도 “그 사건 이후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내가 아끼던 사람이 어디론가 끌려가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며 “그 분이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나는 바로 옆방에서 들어야만 했다. 그 이후 나는 정신병원에 감금당했다. 한달 가까이 정신병원에서 지냈고 아무리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나를 가두고 약물주사도 놨다”고 했다.

심수봉은 2006년 11월 일본 아사히신문과 인터뷰로 10·26 사건 비화를 알리기도 했다. 그는 사건이 일어난 궁정동 만찬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세 번째 만난 자리였다고 했다. 심수봉은 중학교 때 첫사랑인 가정교사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일본 가수 ‘마소라 히바리’ 레코드로 일본 노래를 익혔고 이 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대면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심수봉은 사건 이후 일주일간 정보기관 지하실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이 때 조사를 담당했던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 본부장은 조사를 마친 뒤 “대단하다. 남성들은 다 도망갔는데 용기를 내 현장에 남았다”며 용돈을 건넸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그를 비난하는 사람의 기분도 안다”며 “국민의 생활고를 구한 공적은 있지만, 정신을 말살했다는 거겠지. 지금은 ‘이념이 첫 번째, 생활은 두 번째’로 가치관이 뒤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심수봉은 “사람들은 내가 10·26 사건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보낸 것은 모르고, ‘10·26 사건으로 장사한다’고 말한다”며 “하지만 나는 음악인으로, 심수봉으로 살고 싶었다. 그 사건으로 이름난 가수가 아니란 걸 음악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심수봉은 사건 이후 밤무대에 출연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히트를 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심수봉은 당시 한달에 7000만원(현재 가치로 약 3억원)이 넘는 저작권료를 벌어들였다고도 고백했다. 심수봉은 “저렇게 저질인 줄 몰랐다고 욕 먹기도 했다. 외설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다”고 했다.

이외에도 심수봉은 자신의 히트곡 ‘그때 그 사람’ 속 ‘그 사람’이 가수 나훈아였다고도 최초로 고백했다. 그는 “8년 여간 절절하게 나훈아를 짝사랑했다”며 “나훈아가 군대에서 위험한 임무에 투입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저 사람 대신 제가 죽겠다’는 기도까지 했다”고 했다.

심수봉은 데뷔 전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당시 나훈아가 찾아와 병실에서 기타를 연주해 줬다고 밝히며 이 때문에 노래 가사에도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라는 대목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선명 기자 57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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