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의 디올백 사건, 디올 남매가 알았다면?

최보윤 기자 2024. 6. 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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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TIQUE LETTER]
김건희 여사의 수수 의혹에 휩싸인 디올 백(레이디 디올 파우치). /디올 홈페이지

패션계를 떠나 올 상반기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렸던 브랜드를 꼽자면 단연 디올일 것 같다. 명품이란 단어만큼이나 익숙해져 버린 ‘에·루·샤’에 약어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근 몇 년 사이 이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처음이다.

업계에선 명품들끼리 연간 매체 커버리지(신문이나 방송 보도) 분량 등을 두고 암묵적인 경쟁을 하는데, 올해는 그 모든 치열한 ‘물밑 전쟁’이 사실상 의미없어져 버렸다는 이야기들도 나온다. 평소 같으면 각종 패션 화보나 앰버서더 선정, 패션쇼 참석이나 방송 협찬 등으로 화제성을 일으키곤 했지만, 어떤 노력으로도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의혹 건에 대한 파급력을 압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가방이 디올로 추정된다며, 유엔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디올 측에 확인 요구 서신을 보냈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 남북이 해외의 한 고가 브랜드를 두고 뉴스에 나란히 등장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디올은 패션계에서 여성의 편에서, 여성성을 드높이는 브랜드로 꼽힌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1905~1957)이 1947년 풍성하고 화려한 ‘뉴 룩(New Look)’으로 디자인 혁신을 한 뒤다. 전란(戰亂)으로 지친 여성들에게 우아한 아름다움을 즐길 권리를 주고 싶다는 디자이너의 뜻이 담겼다. 2차대전 후 물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겉치레로 보이는 ‘옷 따위’에 원단을 대거 사용하는 데에 지적이 나올법했지만, 여론은 디올 편이었다.

여기까지가 보통 대중에 알려진 디올 스토리다. 각종 사치품 논란 속에, 디올을 좋아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우곤 할 때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상류층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디올은 옷이든 가방이든 신발이든 그게 뭐가 됐든, ‘제2의 피부’마냥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처럼 인식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궁금한 건 여기에 있다. 디올을 향유하는 그들 중에서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이 필생의 업적인 ‘뉴 룩’을 선보이고, 스스로 “영혼을 쏟아부었다”고 말하는 ‘미스 디올’ 향수를 선보인 진짜 이유를 아는 지에 대해서다.

카트린느 디올./Dior-Charbonneries Archive

혁신적인 패션 뒤엔 한 여성이 있었다. 독일 나치의 참혹한 고문에서 살아남은 동생, 카트린느 디올이었다. 크리스챤 디올보다 12살 어렸던 카트린느는 어린 시절 마치 자신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오빠를 믿고 따랐다. 프랑스 노르망디 부유층에서 자라났지만 1930년대 대공황으로 집안이 폭삭 망한데다 어머니까지 패혈증으로 사망한 뒤 남매끼리 의지해야 했다. 오빠인 크리스챤이 미술 컬렉터였던 부모님의 취향을 닮아 패션 디자인에 빠져드는 동안, 모자 만드는 직공으로 일했던 동생은 1940년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입한다. 프랑스 망명군 지도자인 샤를 드골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카트린느는 프랑스 최초의 레지스탕스 정보수집책인 F2에 가입해 정보요원으로 일했다.

결국 1944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카트린느는 24시간이면 죽어나간다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물고문은 물론, 익사 직전까지 얼음 물에 잠기기도 했다. 다 벗겨진 채로 삼각형 나무 틀에 올라 매질을 당했다. 동료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그녀는 히틀러의 유일한 여성 강제 수용소인 독일 인근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 갇힌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상의 지옥’이라 불렀다. 6년 동안 약 13만 명의 여성이 라벤스브뤼크에 수감됐고,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3만 명에서 9만 명까지 추산되고 있다. 화장실도 없는 시멘트 바닥에서 먹고 자며 폭격용 비행기 부품을 만들어야 했던 그녀들에겐 일부러 불량품을 만드는 것이 그들만의 ‘저항’이었다.

카트린느를 포함한 프랑스 여성들은 연합군의 공세를 피한 독일군에게 다시 이끌려 1945년 2월 독일 라이프치히 인근 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녀의 오빠 크리스챤 디올은 동생을 꺼내기 위해 레지스탕스와 프랑스 정부 관계자들을 접촉했지만 무산됐다.

연합군의 독일을 향한 폭격은 카트린느 같은 포로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죽음의 행진’이라 불린 참혹함 속에도 꽃은 피고 열매는 열렸다. 카트린느는 죽음의 토양 속에 피어난 한떨기 꽃같았다. “포로도 적에게 산 채로 넘겨선 안된다”는 독일군 장교의 외침은 연합군의 집중포화에 잦아들었다. 자욱한 연기가 사라지고, 불구덩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진흙더미 위에서 카트린느는 숨을 쉬었다.

1945년 5월 그녀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오빠 크리스챤 디올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혹독한 고문과 수용소의 참상은 패션쇼 모델까지 했던 꽃다운 그녀를 화석처럼 만들어놨다.

전쟁 중 ‘피고용인’으로 부유층을 위한 디자인을 했던 크리스챤 디올은 동생과 소식이 끊어진 뒤 디자인에 대한 의미를 잃었다. 그랬던 그가 동생을 다시 만나고 디자인 열의를 다시 꽃피웠다. 뼈밖에 남지 않은 몰골로 겨우 숨만 쉬던 동생은 추악한 악의 타락을 증언하는 히로인이었다. 비록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피폐했던 동생이었지만 그에겐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보였다. 더 아름답게 꽃피우게 하고 싶었다.

크리스챤은 언제나 아름다웠던 동생 카트린느가 환하게 다시 웃을 날만을 기다렸다. 섬세한 꽃잎으로 이루어진 화관에서 영감을 받아 부드럽게 패딩 처리된 실루엣을 구상했다. 크리스챤은 꽃분홍빛 볼을 붉히며 오빠에게 장난치던 그때가 빨리 돌아오길 빌며 다시 의상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일년쯤 지났을 때 그의 동생 카트린느는 디올이 다시 차린 매장 의자에 앉아 오빠가 예전처럼 선보일 쇼를 기다렸다. 목숨을 잃을 뻔한 여동생과, 디자이너로서의 생명을 잃을 뻔한 오빠가 마치 한 몸처럼 피운 꽃이 바로 ‘뉴 룩’이었다. 그녀를 닮은 꽃향기는 ‘미스 디올’이란 이름을 달고 패션쇼 장을 가득 메운 향으로 변했다. 그게 요즘의 ‘미스 디올’ 향수다.

1947년 디올 남매의 모습. 맨 왼쪽부터 카트린느 디올의 연인이었던 에르베 파피요 데 샤보너리, 카트린느 디올, 크리스챤 디올, 가정부 르페브르/Dior-Charbonneries Archive

카트린느의 생존기는 1952년 게슈타포 재판 증인으로 그녀가 나서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 자원 전투원 십자 훈장을 받았다. 또 폴란드에서는 용맹의 십자가를, 영국에서는 자유를 위한 용기에 대한 왕의 메달을 받았다.

프랑스 최고 디자이너로 꼽히는 오빠를 두고, 힘든 상처였지만 영예로운 저항의 상징인 훈장의 주인공으로 엄청난 부(富)를 누리며 호화롭게 살 기회가 그녀에겐 분명 있었다. 하지만 카트린느는 모든 부를 멀리하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국제 꽃 중개인으로 2008년 91세 명이 다할 때 까지 평생 조용하게 꽃을 가꾸며 살았다. 그녀의 손끝은 화려한 매니큐어가 아닌 재배하던 풀잎에 물들어 평생 초록색이었다고 했다.

‘디올’이란 화려한 글자 뒤에 숨은 이 이야기들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카트린느 디올의 숭고한 삶에 대해 누군가라도 들려줬다면, 불의와 악에 맞서는 레지스탕스의 항거 정신을 잠깐이라도 인식했다면 요즘 뉴스에 거론되는 그러한 ‘사건’은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크리스챤 디올과 ‘미스 디올’ 카트린느 디올이 아직 살아있다면, 요즘의 사건을 두고 과연 뭐라고 반응했을까.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디올이, 검은 손이 오가는 듯한 수수 의혹 속 ‘그 물건’으로 전락한 걸 보면 그들은 무덤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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