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산과 호수 사이, 춘천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강원도 춘천에서 강줄기 따라 내려가며 도시를 누볐다. 산과 호수, 이야기가 여행자를 온화하게 맞았다.
설렘에 들뜬 사람들이 일행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방긋거린다. 훈훈한 기차 안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우리 열차는 춘천, 춘천 가는 ITX-청춘 열차입니다." 덜컹이는 소리를 노래 삼아 듣다가 눈을 감았다.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기차는 날랜 속도로 우리를 강원도 춘천에 데려다 주었다. 승강장에 내리자마자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찬다. 볕은 곳곳에 스며들어 대지를 적당하게 데운다. 한차례 비가 쏟아진 다음 날이라 눈앞이 선명하다. 호반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증명하듯, 역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른 북한강이 보인다.
마음껏 뛰노는 해피초원목장
자동차를 타고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번 여정은 춘천 북쪽에 위치한 추청산에서 시작해 북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리닫을 작정이다. 사북면 깊숙이 파고드니 세상이 초록빛으로 물든다. 추청산 자락에 자리한 해피초원목장도 녹음이 짙어지는 중이다. 얕은 언덕을 지나 입구에 다다르자 시야가 탁 트인다. 말과 양은 연두와 초록이 뒤섞인 들판 위를 한가로이 어슬렁거리고, 때때로 나직한 소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23만 제곱미터(약 7만 평) 초원에 펼쳐진 이곳은 소, 양, 염소, 말 등을 방목하는 목장이다. 1993년 운영을 시작할 당시 한우 방목장이었으나 지금은 토끼, 당나귀, 공작 등 다양한 동물이 살아간다. 2013년 체험형 농장으로 선정된 후 먹이 주기 같은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해 방문자는 동물과 자연스럽게 교감한다.
산비탈에 조성한 방목장에 양이 무리 지어 모였다. 사람이 무섭지 않은지 다가가도 개의치 않은 채 젖은 땅 냄새를 맡고 풀을 뜯는다. 무리에서 떨어진 작은 녀석 곁에 쭈그려 앉았다. 귀를 기울이자 양이 풀 뜯는 소리, 우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이렇게 가까이서 양을 관찰하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신기하고 놀라워 발소리를 죽이고 꽁무니를 따라다닌다. 그러는 사이 목장 여기저기에 쓰여 있는 문구들이 눈에 띈다. '먹이는 반드시 적당량만 주세요.'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아 예민하니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동물을 소중히 대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문장들. 방문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지켜보며 추억을 쌓는다. 양들이 사람을 피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제 방목장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아름드리나무가 듬성듬성한 방목장을 뒤로하고 오솔길에 들어선다. 산책하듯 10분 정도 걸으니 아래에서는 상상도 못 한 풍광이 나타난다. 드넓은 초원, 그림처럼 펼쳐진 춘천호와 호수를 감싼 산이 웅장하다. 소들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여유롭게 들판을 누빈다.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겨 차원을 넘어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한동안 말을 잊고 그 모습을 뜯어보다 카메라를 들었다. 곱고 눈부셔서 사진으로라도 남겨 몇 번이고 꺼내어 보고픈 풍경. 사람들은 그림 같은 배경을 뒤에 둔 채 사진을 찍고,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다는 듯 춘천의 자연을 눈에 담는다. 훗날 지금을 돌이키면 행복한 감정이 가장 먼저 느껴질 테다.
목장을 나서는데 흙길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엎드린 새끼 염소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거리를 좁혀 손등을 내밀었더니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다 가만히 제 머리를 댄다. 교감하기를 원한다는 뜻 같아 용기를 내어 작고 부드러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렇게 자연과 가까워지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하늘을 날아서, 삼악산호수케이블카
산 중턱에서 노닐었으니 아래로 방향을 바꾼다. 호수에 본격적으로 닿기 전, 특별한 수단으로 산과 땅 사이를 건너려 한다.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공중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삼악산호수케이블카는 북한강이 굽이지는 곳에 솟은 삼악산과 춘천을 대표하는 호수인 의암호를 동시에 만나도록 해 준다. 의암호 정차장에서 상부인 삼악산 정차장까지 3.61킬로미터 거리를 횡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 정도다. 하늘을 날아 이동한다니, 발밑을 지나치는 광경마저 놓칠 수 없어 일반 캐빈 대신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털 캐빈을 택했다. 승객을 태운 캐빈이 정차장을 벗어나자 속도가 붙는다. 금세 땅과 멀어지고, 자동차와 나무가 손톱처럼 작아질 때까지 아래를 바라보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의암호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주의 깊게 살피면 표면에 이는 물결도 발견할 수 있다. 붕어섬을 지나니 삼악산과 점점 가까워진다. 거대한 병풍이 앞으로 곧장 다가오듯 압도적이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감탄하는 사이 순식간에 해발 433미터에 다다랐다. 높은 곳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다. 삼악산 정차장에 내린 후, 산책길을 지나 스카이워크 전망대로 갈 수 있어서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덱 길을 운동하듯 오르자 보기만 해도 짜릿한 스카이워크가 드러난다. 캐빈에 앉아서 변화하는 풍경을 구경할 때도 흥미로웠지만, 아슬아슬한 전망대에 발을 직접 내디뎌 춘천을 굽어보니 또 다른 감흥이 인다. 시내와 북한강, 춘천대교, 붕어섬…. 청량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감각을 즐기며 한참 동안 도시를 응시한다.
의암호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산이나 바다, 호수의 둘레를 이어 산책하도록 만든 길을 둘레길이라 한다. 춘천 의암호에는 둘레길과 더불어 물레길이라 하는 특이한 코스가 존재한다. 삼악산호수케이블카 하부 정차장에서 불과 도보 10분 거리에 물레길 시작 지점이 있다. "여기서 카누를 타고 하중도 근처로 이동할 겁니다. 물 위를 오가니 둘레길, 올레길처럼 물레길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구명조끼를 건네는 직원이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목표 지점까지는 약 1.5킬로미터. 왕복하는 코스라 총 3킬로미터 정도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성인 세 명이 정원인 카누는 적삼나무를 활용해 손수 제작했다. 수리와 관리 역시 꼼꼼히 한다니 신뢰가 간다. 체험 시작 전 안전 교육 이수와 구명조끼 착용은 필수다. 오후가 된 시각, 태양도 하늘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초여름의 공기가 의암호에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이제 출항 준비는 끝났다. 노를 쥔 채 배에 올라 조심조심 중심을 잡고 앉는다. 마음이 요동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몸까지 전해지는 법이다. 심호흡을 한 다음, 그립을 잡고 노를 물 깊숙이 넣어 앞에서 뒤로 힘껏 민다.
방향 잡기가 어려워 왼쪽, 오른쪽 번갈아 노를 젓는다. 동력이 없는지라 힘을 많이 들여야 할 거라 예상했지만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미끄러지듯 쑥쑥 나아간다. 패들링에 점차 익숙해지자 뱃사공이 된 듯 느긋하다. 뱃머리는 하중도 자연생태공원 쪽으로 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위는 오로지 물과 숲, 그리고 파란 하늘로만 채워진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와 이름 모를 새의 울음이 조화롭다. 유유자적이란 이런 상황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산등성이 뻗어 내린 반대편에는 점처럼 작아진 케이블카가 삼악산으로 줄지어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문득 캐빈에서 본 의암호가 떠오른다. 수면에 찰랑거리는 물비늘이 물고기 떼 같았는데, 카누에 올라타 호수를 누비니 물고기 한 마리가 된 기분이다. 그들처럼 날쌔게 헤엄쳐 볼까, 첨벙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정다운 역에서 마주한 기차
여정을 마무리하러 가는 길, 춘천에 올 때처럼 다시 기차를 만나러 김유정역으로 간다.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딴 역은 본래 신남역이라 불렀다. 1939년 경춘선 개통 이후 신남면에 역을 세워 지명을 붙인 것이다. 알고 보니 역 부근에 김유정의 고향인 실레마을이 자리했고, 2004년 지역 주민과 문인들의 요청으로 신남역은 김유정역이라는 간판을 달게 된다. 2010년 수도권 전철 경춘선이 운영을 시작하며 한옥 형태의 역사를 새로 지어 옛 역사는 더 이상 쓰이지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정취를 가득 품고 여행자를 맞이한다.
놀랍게도 아직 옛 김유정역에서 기차를 볼 수 있다. 승강장에 무궁화호 객차 두 량을 가져와 이를 각각 관광 안내소와 북 카페로 꾸몄다. 차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따끈한 볕에 몸을 맡기고 책을 읽거나 음료를 마신다. 좌석 위 짐칸을 선반으로 활용해 책을 가지런히 정리한 것이 인상적이다. 내부에 실제 무궁화호 좌석 일부, 역 안내판, 승차권 등을 전시해 좁은 공간인데도 볼거리가 넘친다. 차창 너머 옛 김유정역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어떤 곳에서도 쉽게 마주할 수 없는 배경이다.
소설가 김유정이 지낸 마을이자 그가 지은 소설의 배경이었다는 실레마을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한다. 길 중간에 그의 소설 문구를 인용한 팻말을 세워 산책에 소소한 재미가 붙는다. 아카시아꽃이 한창인지 마침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날아와 코를 간질인다. 향기는 사람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촉매제라고 한다. 산과 호수의 향기로운 내음을 감각할 때면 머릿속에 이 도시가 언제고 그려질 것 같다. 춘천의 색이 조금씩 짙어진다. 봄 향기 그윽하던 도시에 여름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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