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같은 오픈런은 아니지만 산다…세대 교체된 중국 소비시장
세계는 지금 ㅣ 중국에서 한국의 브랜드 파워
‘의류는 자유무역협정(FTA) 원산지 증명서만 있으면 수입 원가의 10%를 절감할 수 있는데 한국기업들이 해주지 않아 못하고 있다.’ 미팅을 시작하자마자 상하이 패션 기업이 불평을 쏟아냈다. 매년 평균 수입 관세율 8%를 지불하며 한국 의류를 200억원씩 수입하는 바이어다. 한-중 FTA만 활용하면 200억원의 8%, 매년 16억원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관세 절감액만큼 수입을 더 할 수 있고, 현지 가격경쟁력 제고로 소비자 수요도 크게 확대될 수 있는데 지금은 관세를 다 내면서 수입하고 있다.”
기시감이 든다. 2011년 한-유럽연합(EU) FTA 체결 후 인터넷에서 유럽 명품 쇼핑 후기가 유행했다. 명품 매장에서 원산지 증명만 하면 관세를 대폭 줄일 수 있지만 직원들이 잘 몰라 FTA 적용을 못한 탓에 관세를 다 냈다는 하소연이다. 관세 몇백만원을 더 내더라도 소비자에게 제품을 구매하게 하는 브랜드의 힘. 샤넬, 에르메스 같은 유럽 명품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사례가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 브랜드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신 소비자 집단 공략
인스타그램을 사용할 수 없는 중국에서는 현지 플랫폼 ‘샤오훙슈’가 중국판 인스타그램으로, 브랜드 인지도의 척도이자 트렌드 세터(Trend Setter·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매달 이용자 3억 명 이상이 일일 평균 72분 이상 사용한다. 샤오훙슈는 이용자를 Z세대, 대도시 거주자, 대졸 이상 고학력, 1인당 월 소비액 5천위안(약 95만원) 이상으로 정의하는데, 중국을 대표하는 신 소비자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패션은 샤오훙슈 신 소비자 집단이 가장 관심 있는 분야 중 하나이다. 한국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가 샤오훙슈 스토어 월매출 1천만위안을 돌파했다. 이러한 트렌드를 감지한 샤오훙슈는 매달 100만위안 이상 매출을 창출하는 한국 브랜드 100개 육성을 추진하며 현지 한국 패션 수요를 선점하려 노력한다.
그뿐만 아니다. 중국 주요 아웃도어 기업은 40여 년간 해외 위탁생산을 통한 성장 시기를 거치고 이제는 종합패션 브랜드 기업으로의 전환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가격대별 브랜드 라인을 구축 중인데, 럭셔리 브랜드는 유럽 명품 브랜드로, 중저가는 자체 브랜드로 라인업을 구축했다. 현재 비어 있는 고가 브랜드 분야에서는 한국기업과의 협업을 구상하고 있어 상하이 무역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 글로벌 기업이 한국 브랜드와 합작해 중국에서 고가 브랜드를 론칭하고, 한국 디자인 센터에서 프리미엄 아웃도어 원단 개발, 디자인 등 연구·개발(R&D) 공동 진행하기를 희망한다. 현지에서 ‘디자인 바이 코리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존과 달라진 중국기업의 수요를 어떻게 봐야 할까? 팬데믹으로 3년간 닫혀 있던 중국 시장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거시경제 관점에서 보면 2024년 중국은 1분기 경제성장률 5.3%를 달성하며 연간 목표치 5%를 초과했지만, 경제성장은 소비가 아닌 제조업과 수출이 이끌고 있다. 소비시장은 2022년 -0.3%, 2023년 7.2%, 2024년 1분기 4.7% 증가하며 팬데믹 이전에 약 8% 성장하던 시절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현지 대형매장들에 따르면 고객 1인당 평균 구매액은 팬데믹 이전의 80% 수준을 웃돌고 있다. 내수 중심의 성장을 추진하는 중국 소비시장에 저성장 기조가 지속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젊은 세대들의 애국 열풍 ‘궈차오’, 중국기업의 기술 발전 등 현지 상황 변화로 한국 제품의 선호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아직 한국산을 선호하는 시장도 한-중 기업의 경쟁이 치열해졌다고도 한다. 이를 보고 누군가는 중국 시장의 성장세가 주춤해지며 성숙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것이다. 누군가는 거대한 시장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부 수요를 보며 기존 시장의 소멸과 함께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것이다. 통계 지표나 1차적인 경제 현상 이면에 있는 시장의 근간을 살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한국산 중고가격대 제품 수요, 중국 소비의 저성장 기조, 한국산의 선호도 감소. 이처럼 서로 모순돼 보이는 현상들은 지난 3년간 급격히 발생한 중국 소비시장의 변화와 연결돼 있다.
중국 소비시장의 변화
중국 소비시장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사회경제 전반의 구조적 변화로 새로운 소비주체가 등장한 것이다. 2022년 중국은 1961년 인구 통계 작성 이래 최초로 인구가 85만 명 감소했으며, 2023년에도 208만 명 줄어 글로벌 인구 1위 자리를 인도에 내줬다. 신생아 수도 2016년 1883만 명에서 2023년 902만 명으로 7년 만에 50% 감소했다. 이러한 인구 구조 변화는 Z세대, 1인 가구, 실버인구 증가 등을 이끌며 중국 소비시장의 세대교체를 불렀다.
경제적으로 중국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3년 6754달러에서 2023년 1만2684달러로 10년 동안 2배 가까이 성장했다. 연봉 5천만원일 때와 1억원일 때의 소비가 다르듯이, 중국 소비도 변했다. 2023년 중국 사치품 소비액은 11% 증가하며 전체 소비 증가율 7.2%를 웃돌았다. 소득 증가로 신 중산층이 전면 등장하며 프리미엄 소비가 확대된 것이다.
두 번째로 중국 소비시장에 신 소비주체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계층별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이들의 소비 트렌드를 살펴보면 식품은 저당, 간편식, 중고가 스낵, 화장품은 유기농, 기능성 제품 등이다. 소비관념이 가격보다 건강, 친환경 등 가치 중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생활용품은 디자인 소품, 아웃도어 용품, 패션은 디자이너 브랜드, 스트리트 패션 등 소비를 통해 개성과 정서적 가치를 표현하는 고부가가치 소비가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다. 즉, 10년 전에는 가성비 동대문 의류가 유행했다면 이제는 트렌드를 주도하는 디자이너 패션으로, 로드숍 화장품은 브랜드 정체성과 스토리가 있는 중고가격대 제품으로 수요가 바뀐 것이다.
세 번째로 구매행위가 단순히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온라인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구매 결정하는 소셜마케팅이 활성화됐다. 소셜마케팅은 플랫폼 이용자 간 상호작용과 자체 제작 콘텐츠를 통해 쇼핑하는 새로운 소비 행태로, 라이브커머스, 숏폼 등 다양한 마케팅 활용이 가능하다. 이에 중국 소비시장이 온라인 소셜마케팅을 중심으로 유통구조가 변화하며 신규 브랜드가 지속 유입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됐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용이 많이 들고 마케팅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진입 장벽이 높아진 단점도 있다. 몇 년 전 잘나가던 브랜드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고, 처음 보는 제품들이 대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통구조와 시장 트렌드가 변화하는 시점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성패가 나뉘는 것이다. 소셜마케팅이 보편화하는 트렌드에 발맞춰 제품 및 고객별 특화된 플랫폼을 선택하고 마케팅 콘텐츠를 준비하는 노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중국의 변화는 소비시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코로나 3년, 리오프닝 1년을 거치며 많은 글로벌 기업이 대내외 변수 대비 및 공급망 재편 전략을 추진 중이다. 상하이에는 2023년 기준 글로벌 기업의 지역본부 956개사가 설립돼 있다. ‘상하이 국제무역센터 촉진 조례’(2024년 1월), ‘2024년 다국적기업 지역본부 설립 발전자금 지원정책’(2024년 2월) 등 유치 정책도 집중 지원 중이다.
이렇게 글로벌 기업의 지역본부가 집중된 현지에서 글로벌 공급망 다원화 움직임을 포착하고 수출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 일례로 상하이에 지역본부를 둔 글로벌 자동차부품 기업 A 사는 수출 제품의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중국과 거리가 가까운 한국으로 소싱 확대를 결정했다 . 우리 기업들이 대중국 수출 구조의 전환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올라탈 좋은 기회이다 .
새로운 시장에는 새로운 수요가
상하이 총영사관에 따르면 세븐틴 등 케이(K)-팝 공연과 현지 연휴 수요 등을 시작으로 2024년 3월 화둥 지역의 비자 신청이 월 4만3천 건을 돌파하며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월평균 3만6천여 건을 초과했다. 이러한 인적 교류 수요는 대내외 요인의 영향으로 2024년에 계속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예전과 같이 단체 관광하는 ‘유커’가 아닌 개별 관광하는 ‘싼커’로 관광 수요 구성이 변화했음에도 이전 수치를 돌파한 것이다. 달라진 수요만으로 예년의 규모를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례이다.
중국은 K-콘텐츠, K-소비재가 처음 유행한 해외시장으로, 중국을 기점으로 미국, 일본 등 글로벌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중저가 소비재 수출이 보편화됐다. 이제는 중국 기업들의 한국산 중고가격대 제품의 도입 수요를 기회 삼아 글로벌 소비재 수출을 프리미엄으로 전환하는 첫걸음으로 중국 시장을 활용해야 한다.
상하이의 성수동이라 불리는 신톈디 마당루 왼편에는 1919년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오른편에는 2013년 설립된 샤오훙슈 본사가 있다. 2024년, 마당루에 도착하면 임시정부를 등지고 오른쪽의 샤오훙슈로 간다. 샤오훙슈 신 소비자들이 추천하는 한국 패션을 확인하고 지원방안을 논의하면서 100년 전, 10년 전과 달라진 한국의 역할과 중국의 수요를 체감한다. 샤넬, 에르메스 오픈런처럼 비싸도 사고 싶은 한국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변해도 수요는 항상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때이다.
정연수 KOTRA 상하이무역관 차장 ysjeong@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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