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가 의심 받는 전쟁의 시대, 금의 가치는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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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태초부터 금을 갈망했다. 다른 지역과 교류가 없던 먼 옛날에도 여러 지역의 문명은 공통적으로 금을 귀하게 여겼다. 아름답게 반짝이고 녹슬지 않으며, 무엇보다 채굴량이 적은 금은 인간의 본능적인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인류가 지금까지 채굴한 금을 모두 합쳐도 각 면이 21m인 정육면체 규모에 불과하다.
자산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오르고, 수요가 줄면 가격이 내린다. 대부분의 광물은 인간의 씀씀이에 따라 가격이 책정된다. 그런데 금은 용도가 별로 없다. 금니 등 산업재 수요는 전체 생산량의 10% 내외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보석류를 제작하거나 그냥 보관하는 목적으로 쓰인다. 그러다보니 경기의 영향도 별로 받지 않는다. 비슷해 보이는 은과도 다르다. 은은 전체 채굴량의 30%만 보석류 제작에 쓰이고 나머지 70%는 전자제품, 태양광 패널 등 산업용으로 쓰인다. 경기가 좋아 산업이 활성화되면 은의 수요가 늘어 가격이 오른다.
금값 역대 최고치
최근 금 가격이 많이 올랐다. 국제금융시장에서 금 가격은 2023년 4분기 이후 빠르게 상승했다. 2024년 4월 트로이온스당 2392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뒤 2300달러 선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금 가격은 위험과 금리에 영향을 받는다. 금은 안전자산이라 불린다. 투자가치가 안전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4년부터 10년간 금 가격 변동성은 11.8로, 위험자산으로 인식되는 주식(12.8)만큼이나 높은 변동성을 보였다. 그럼에도 금을 안전자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상이 멸망해 인류가 이룩한 모든 제도가 무너졌을 때도 가치를 보전할 수 있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망하면 우리가 가진 5만원짜리 지폐는 종잇조각이 되지만 우리가 보유한 금은 가치가 유지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원화의 가치가 무의미해졌을 때 우리 국민은 금을 모아 달러를 사서 외환보유고를 채웠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인 달러, 미국 국채가 흔들리면 금 가격이 오른다. 국제 금 가격의 전 고점은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위기 등 미국이 흔들릴 때였다. 돈의 가치, 금리가 올라가면 금의 가치는 하락한다. 금은 이자를 주지 않는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를 많이 주는 채권의 가치가 오르고, 금의 가치는 떨어진다.
사실 금은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가 없고 이자도 주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금 보유량이 적은 나라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순위 13위, 외환보유고 순위 9위의 경제대국이지만 금 보유량은 36위에 불과하다. 2013년 이후 금을 전혀 사지 않았다.
한국은행이 금을 사지 않는 이유는 힘들게 수출로 획득한 부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금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2023년 4월 <외환보유액으로서의 금,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리포트에서 “외환보유액은 가치가 안전하게 유지되고 상시 현금화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돼야 하는데 금은 역사적으로 높은 가격 변동성을 보이고 유동성이 높지 않은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최근 금 가격 상승은 달러가치, 금리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전의 논리로 설명이 안 된다. 달러가치를 표시하는 달러 인덱스와 미국 기준금리는 최근 20년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최근 금 가격이 오르는 이유는 특정 국가들이 금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금협회에 따르면 2023년 전세계 중앙은행이 매입한 금은 총 1037톤(t)이다. 이중 20% 넘는 225t을 중국 중앙은행이 사들였다. 최근 5년으로 넓혀보면 중국, 튀르키예, 폴란드, 러시아, 인도 등 5개 국가가 전체 매입량의 87.5%를 사들였다. 한국은행은 “전쟁 등으로 안전자산 수요가 높은 국가들”이라고 설명했다.
화폐는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수단이다. 국제교역을 하려면 전세계 누구나 가치를 인정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대표 수단은 달러다. 달러가 전세계 누구나 인정하는 기축통화로 자리잡은 근원에는 금이 있다. 화폐는 역사적으로 금의 그림자였다. 가치를 인정하는 저장수단은 금이었고, 금을 들고 다니기 무거우니 사람들은 거래의 편의성을 위해 금 보관증을 가지고 다녔다.
금 보관증을 가져갔는데 금을 보관하던 사람이 금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금 보관증 유통은 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금 보관증, 화폐를 들고 가면 금으로 교환해주는 금본위제는 보편적인 화폐제도였다. 영국이 전세계 식민지에서 금을 끌어모을 때 영국 파운드화는 기축통화였다. 영국이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으니 파운드화를 가져가면 언제든 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턴우즈체제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은 보유한 금보다 너무 많은 파운드화를 찍어냈다. 파운드화를 들고 가도 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불신이 생겼다. 그럴 땐 남들보다 먼저 가서 금을 돌려받는 게 유리하다. 너도나도 금을 돌려 달라고 하자 영국은 금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금과 교환할 수 없는 지폐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종이일 뿐이다.
유럽 국가들은 금태환을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편리하게 가치를 저장할 수 있는 수단은 필요했다. 유럽을 비롯한 44개 국가는 1944년 미국 브레턴우즈에 모여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전쟁의 포화를 맞지 않았고 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달러를 가져가면 35온스를 주기로 했고, 나머지 화폐는 달러에 가치를 고정시켰다.
하지만 브레턴우즈체제도 30년을 가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치르며 보유한 금에 견줘 4배나 많은 달러를 찍어냈다. 다시 한번 너도나도 금을 돌려받으려 하는 ‘골드런’이 발생했다. 결국 미국 역시 1971년 금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금과 화폐의 연결 고리는 끊어졌지만 우리는 전세계 어디서나 달러를 제시하면 무언가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향한 신뢰가 달러가치를 유지시킨다.
최근 금을 사 모으는 국가들은 달러가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고 의심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석유 등 원자재를 팔아 외환보유액 6430억달러를 알토란 같이 모았다. 그 외환보유액의 60%(3850억원달러)를 가장 안전한 저장 수단인 달러로, 가장 안전한 장소인 서구 은행에 보관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자 서구 국가들은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을 동결해버렸다. 가치를 저장하고 언제든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화폐의 근간이다. 예금할 때 ‘전쟁을 일으키면 돌려주지 않는다’는 조건은 없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모아놓았던 부를 한순간에 잃었다. 또 달러를 거래하는 국제결제망 ‘스위프트’에서 퇴출당했다. 달러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러시아의 잘못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분명 달러에 배신당했다. 달러가 아니라면 가치를 무엇으로 저장할 것인가. 러시아는 금을 사 모으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열심히 수출로 번 돈으로 가장 믿을 수 있는 자산인 미국 국채를 1조달러 넘게 사들였다.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규모다. 그런데 미국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최악의 경우 과연 미국에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심한다. 중국은 외환보유액의 미 국채 비중을 줄이고 금을 사 모으고 있다.
달러를 의심하는 국가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범죄 집단이 아닌 이상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달러를 사용해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었다.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거치며 언제든 달러로부터 배신당할 수 있는 나라가 생겨나고 있다. 달러를 가져가도 금을 되돌려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달러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심이 피어났다. 그들은 달러의 대체재로 구세대 가치와 신뢰의 상징인 금을 사 모은다.
중국이 당장 미 국채를 모두 팔고 금으로 바꿀 가능성은 없다. 여전히 달러체제는 공고하고 달러를 사용하지 않고 국제교역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위험에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가치를 달러뿐 아니라 금으로 분산 보관해야 할 필요는 커졌다. 신뢰는 얻기 힘들고 깨지기는 쉽다. 한번 깨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금은 본질적으로 화폐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화폐로 표시되는 자산가치를 논하기 어렵다. 하지만 평화의 시기보다 폭력의 시기에 금의 가치가 더 높다는 것은 분명하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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