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지리산, 섬진강, 악양들판을 잇는 박경리 토지길
(하동=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1897년의 한가위. …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로 시작해 '"만세! … 아아 독립 만세! … "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로 마침표를 찍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는 구한말, 동학농민혁명, 일제강점기, 해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살아내는 민초들의 삶을 말할 뿐이다.
민초의 삶이 모여 역사의 강물을 이루다
위대한 영웅이나 큰 역사적 사건을 다룬 세계 문학은 많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를 이루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토지'는 그것을 해냈다는 점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많은 무리'를 역사 속에서 발견한 박경리는 작가인 동시에 역사가였다.
생존하는 것 이상의 진실은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은 추구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했던 박경리의 생명 사상은 '토지'의 저변을 흐른다.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과 지구를 지켜보며 도대체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라고 그는 물었다.
그의 생명 사상은 '토지'를 한국인만의 것이 아닌, 인류의 문화 자산으로 확장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박경리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 동안 '토지'를 집필했다.
1부에서 5부까지 21권, 약 3만 장의 원고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최참판댁과 소작인을 중심으로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용이와 월선의 가슴 적시는 사랑, 서희와 길상의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 구천과 별당아씨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야반도주는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할 만큼 흥미진진하지만 '토지'는 흔히 생각하듯 최참판댁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다.
조선 백성들이 나라 잃은 고난을 어떻게 살았는가가 작품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주제라 생각된다.
'토지'는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역경을 극복한 민족적 생명력에 대한 찬양이자 헌사이다.
하동 평사리 '박경리 토지길'
'토지'의 지리적 배경인 경남 하동 평사리에는 '토지'의 문학적 숨결을 실감하며 걷을 수 있는 도보 여행 길이 있다.
'박경리 토지길'로 명명돼 있다. 평사리 공원에서 시작해 평사리들판, 동정호, 고소성, 최참판댁, 조씨 고가, 취간림, 문암송, 억양천제방을 거쳐 평사리공원으로 되돌아왔다가 화개장터로 다시 이어진다.
총 18∼20㎞에 이르고, 코스를 모두 걷는다면 하루 종일 걸린다.
고소성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평사리 공원에서 화개장터까지 가는 섬진강 변 길은 물 바라기를 하며 걷기 좋지만 약 9㎞에 달한다.
한꺼번에 모든 코스를 걷지 않고 흥미에 따라 구간을 나눠 걷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평사리 공원은 큰 강 중 유일하게 1급수인 섬진강 가에서도 백사장이 드넓고 강폭이 큰 곳에 있다.
대형 주차장, 그늘막, 야외 의자와 탁자 등 야영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오토캠핑장으로 인기가 많다.
평사리 공원에서 화개장터 쪽으로는 걷기길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흙길, 숲길, 나무 데크 길이 섞여 있어 섬진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기에 그만이다.
대나무 숲길이 끝날 때쯤 전망 쉼터가 나타났다. 이정경 하동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쉼터 근처를 옛 포구로 지목했다.
광대놀이 구경하러 장터에 가기 위해 용이가 어린 길상과 봉순을 데리고 나룻배를 탔던 곳이 이곳일까.
약초, 산나물 등 지리산에서 나온 물산과 남해의 싱싱한 수산물을 교역하는 포구가 발달했고, 남부 영호남을 잇는 요충지였던 하동은 예부터 부자 동네였다고 이 해설사는 전했다.
평사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개장, 구례장, 하동장 등 큰 장이 세 군데나 있다. 전국 5대 장으로 꼽혔던 화개장은 지금 관광지가 됐다. 구례장은 아직 건재하다.
봄이면 벚꽃길로 유명한 섬진강 변 19번 국도를 건너 비옥한 악양 들판으로 올라오면 동정호가 있다.
동정호는 산지, 하천, 논을 연결하는 생명의 서식지다.
금개구리, 남생이 등 멸종 위기종의 삶터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빚은 땅, 하동
하동은 지리산이 삼 면을, 섬진강이 나머지 한 면을 둘러싸고 있다. 하동의 아름다운 지세는 예부터 중국의 명지인 악양에 비유됐다.
동정호, 악양면, 평사리 등의 지명은 그에서 유래됐다. '평사'는 '평사낙안'(平沙落雁)에서 나온 말이다.
'모래펄에 앉은 기러기'의 평화로운 정취는 섬진강 변의 희고 고운 모래톱을 보면 실감 난다.
악양들은 형제봉, 칠성봉, 구제봉 등 지리산 준봉과, 섬진강 건너 백운산을 올려다보고 있다.
들판 중간에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한 그루로 보이기도 한다.
넓은 들 지킴이 같은 두 나무는 부부 소나무, 서희-길상 나무로 불린다.
고소성은 지리산이 섬진강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중턱 해발 220∼350m에 있는 산성이다.
성벽 길이는 800m 정도다. 동북쪽은 지리산의 험준한 산줄기여서 방어에 유리하고, 서남쪽은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해에서 오르는 배들의 통제와 상류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에 좋은 위치이다.
고소성에서 형제봉까지는 5.3㎞ 정도 된다.
고소성의 정확한 축성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신라 혹은 백제의 축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가야의 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고령의 대가야가 백제의 진출을 막고, 왜와 교류하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최참판댁 주인마님인 윤씨 부인이 낳은 사생아 구천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는 한과 별당아씨에 대한 정념을 달래기 위해 밤이면 고소성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악양 들판을 굽어보는 최참판댁과 박경리 문학관
최참판댁은 실제 고가가 아니다. TV드라마 촬영장으로 건립됐다. 최참판댁 주변에 용이네, 칠성이네, 장터 주막 등의 초가가 자리 잡고 있다.
토지 이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됐고, 연간 100만 명이 이상이 방문하는 관광지이다. 연못이 있는 별당은 아름다운 별당아씨를 떠올릴 만큼 조촐하고 단아하다.
장터 주막에는 박경리의 시가 걸려 있었다. '가끔/ 머릿속이 사막같이/ 텅 비어버린다/ 사물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기도 하고/ 시간이 현기증처럼 지나가기도 하도/ 그게 다/ 이 세상에 태어난 비밀 때문이 아닐까'('비밀' 중에서) 우리 민족은 '토지'와 같은 대작을 가져본 적이 박경리 이전에 없었다.
박경리 문학관에는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취간림과 문암송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 숲인 취간림은 악양들판 중간을 흐르는 악양천 옆에 있다.
1992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던 정서운 할머니의 뜻을 기리는 평화의 탑이 건립돼 있다.
악양은 항일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여러 차례 전투가 발생했고 희생자가 많았다.
지리산 항일 투사 기념탑도 취간림 공원에 세워져 있다.
축지리에 있는 문암송은 씨앗이 문암이라는 바위틈에 뿌리내린 뒤 바위에 걸터앉은 것처럼 기이한 모양으로 자란 소나무이다.
나무 높이 약 12m, 둘레 약 3m이며, 퍼진 가지의 폭이 12∼17m이다.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하지만, 흙에 뿌리를 내리는 대개의 소나무와 나이를 비교하기 어려워 정확하지 않다.
식물학적 가치와 경관, 마을 주민들이 문암송계를 꾸려 나무를 보호해온 문화적 가치 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삶이 끝나지 않는 한 계속되는 이야기…'토지'
민족의 영산 지리산과 국토의 젖줄 섬진강이 만나는 곳에 넓게 자리 잡은 평사리를 발견했을 때, '토지'의 배경이 될 장소를 찾던 박경리는 '바로 이곳'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지리산은 산체가 크고, 바위가 적은 흙산이다. 웬만큼 사람들이 숨어들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넉넉한 품을 내주었다.
민란, 동학, 일제강점기, 전쟁 때 지리산은 쫓기는 이들의 피신처였다. 그래서 지리산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와 민족적 상처가 많다.
평사리는 최참판댁 같은 만석지기가 나올 만큼 넓고 비옥하다.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에게 경상도 사투리를 풀어내기에 적절한 문학적 배경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지리산, 섬진강, 넓은 농토, 경상도 사투리는 평사리를 '토지'의 배경으로 점지한 요소였다.
토지는 자연의 생명이 자라는 곳이자 사람의 경제활동 무대이다.
'토지'는 삶이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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