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시간 준비만 2시간, 대체 왜 그런가 했더니
"악악, 아악, 악악"
화를 참다 잠이 들어서 그랬을까. 꿈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는데 입 밖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아서, 더 악악 그랬던 것 같다. 언뜻 잠에서 깼는데 남편이 등에 손을 대고 있었다. 까무륵. 다시 잠들었다.
잠이 들기 전 고2 딸아이가 방으로 왔다. "왜? 뭔 일 있어?" 늘 내가 먼저 묻는다. 그러면 아이는 대부분 "그냥"이라고 답한다. 그게 진짜 그냥인지, 할 말이 있는 그냥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떨 때는 진짜 그냥이고 어떨 때는 할 말 있는 그냥이기도 했으니까. 이 대화의 결말은 항상 비슷하다. 나는 말하고 아이는 입을 다문 채 운다.
아이가 온 김에 말했다. 왜 오전 6시에 스스로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8시 10분이 되어서야 겨우 나가는 거냐고. 왜 아빠가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너를 태워주고 와야 하느냐고. 7시 20분에 아침을 먹고, 옷만 갈아입고 나가는데 왜 30~40분이 더 걸리는 거냐고. 어차피 교복을 입는 건데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학교 가기 싫어서 최대한 미루는 거야?" 부드럽게 물었다가 나오는 대답을 듣다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아침 먹으러 나올 때 화장이 끝난 게 아니야."
"응? 그럼 밥 먹고 방에 들어가서 화장을 더 한다는 거야?"
"응."
"(세상에나, 기막혀)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널 좋게 볼 수는 없는 거 아니니? 누가 너 화장한 얼굴이 더 좋대?"
"아니."
"그럼, 네가 만족이 안 되는 거야. 화장을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밖에 나가기 싫어?"
"응."
"네 외모가 싫어? 다 바꾸고 싶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래도 지각을 하지 않는 시간 내에서 화장을 해야지. 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는데 늘 간당간당하게 집에서 나서는 건 아닌 것 같아. 2, 3시간 맘 놓고 화장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해.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완벽한 화장이 아니고 지각을 하지 않는 거 같아. 제시간에 학교를 가면 좋겠어. 엄마 일 시작할 때마다 너무 신경 쓰여."
"나도 안 그러려고 하는데 시간이 내가 생각하는 거랑 다를 때가 많아."
"그럼 지각을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이래서 여고생 있는 집에서 화장품 한 번씩 다 갖다 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구나. 너 화장하는 시간을 우리가 맞출 수는 없어. 그리고 엄마 아침마다 힘들어. 내일부터는 8시 전에 나갔으면 좋겠다(적어도 8시 10분에는 버스를 타야 지각을 면할 수 있다). 내일 모의고사라며, 더 할 이야기 없으면 가서 자."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았다. 그 이유가 화장이었다니. 화장 때문인 줄도 모르고 매번 늦겠다, 왜 안 나가냐, 너 지금 안 나가면 지각이다, 어째서 2시간 전에 일어났는데 늘 이 시간이냐 잔소리를 했던 것이... 조금 허망했다. 실망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 감정이 좀체 다스려 지질 알았다.
'지금이 완벽한 화장을 할 때냐고. 잠을 줄여가면서 화장이라니. 뭐야. 화장이 1순위였어? 그것도 모르고 애 아빠는 지각할까 봐 출근 준비하다 말고 학교까지 번번이 데려다주고.'
생각할수록 너무하다 싶은 마음이 든다. 아이가 화장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외모를 가꾸고 싶은 마음, 모른 척 한 적 없다. 여드름 피부가 심해서 그거 가리느라 화장 시간이 길어지는 걸 안 뒤로는 피부과도 보냈다. 피부는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화장 시간은 더 늘어나고 있다니 할 말이 없다. 화장이 뜨면 안 되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가리느라고 그런단다.
다음날, 오전 8시가 되자마자 방에서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인사도 없이. 제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방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그래도 좋은 엄마인 척 문자를 보냈다. 노력해 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하루 시작이 좋았다고. 날씨만큼 괜찮은 하루이길 바란다고. 6월 모의고사도 무사히 보라고.
그렇게 나름 평화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난 뒤였다. 방치된 화병에 눈길이 갔다. 꽃은 이미 시들대로 시들었다. 화병에 물이 탁했다. 언제 물을 갈아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걸 보면서 혼잣말이 나왔다. 화병의 물이 혼탁하니 꽃도 시드는구나. 그러다 깨달았다. 가끔은 내 마음이 화병 속 물 같을 때도 있었겠구나. 그러면 아이들도 생기를 잃겠구나.
생각은 붙잡을 새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부모의 마음이 혼탁하면 아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겠구나. 아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맑아야겠구나. 마음은 그러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게 문제다. 그래도 이런 깨달음의 순간이 온 것이 반갑다. 화병을 볼 때마다 내 마음속이 맑은지 혼탁한지 돌아볼 테니까. 맑으면 맑은 대로 순간을 즐기고, 혼탁하면 맑아지도록 뭐라도 하겠지.
아이는 모의고사 끝난 기념으로 친구랑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오겠다고 했다. 뭘 했다고. 속에서 심술이 난다. '모의고사 준비를 했던가.' 문자를 보냈다. 했단다. 했다고 하면 했겠지. 혼자 저녁밥을 먹으며 또 화를 삭인다. 뭐든 제맘대로인 게 맘에 들지 않아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전화를 받자마자 후회했고 끊고나서는 더 후회했다. 하지 말 걸. 마음이 맑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는데 성급했다. 마음이 다시 혼탁해졌다. 맑은 물이 떠오르도록 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번개처럼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는다. 물통을 챙겨든다.
"(둘째 아이에게) 엄마 운동 갔다 올게!"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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