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활 걸었다"…보릿고개 넘는 K-배터리, '50조' 쏟아 북미 정조준
[편집자주] 북미는 전기차 잠재 수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여기에 보조금과 관세를 통한 '노 차이나 존'까지 더해졌다. 북미에 50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 K-배터리는 이곳에서 '캐즘' 돌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상 사활을 건 수준이다. K-배터리 기업들이 총 50조원 이상을 북미에 쏟아붓는다. 견조한 전기차 수요 속 마련된 '노 차이나 존' 시장을 선점해 캐즘(chasm, 일시적 수요정체) 탈출의 열쇠를 확보한단 전략이다.
4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은 북미 지역에 2027년 무렵까지 연 633GWh(기가와트시) 수준의 배터리 생산능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1년에 전기차 1000만대 가까이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여기에는 배터리 3사 단독공장 외에도 현대차, GM, 스텔란티스, 혼다, 포드 등과의 JV(합작사)도 포함돼 있다.
KOTRA(코트라)에 따르면 배터리 생산라인을 만드는데는 1GWh(기가와트시) 당 CAPEX(설비투자) 약 1300억원이 들어간다. 전체 투자금액 82조원이 넘는 셈이다. JV에 참여한 완성차 기업들의 투자 비율을 50%로 잡을 때, 배터리 3사가 부담할 금액은 총 50조원에 육박한다.
K-배터리의 '아메리칸 러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SDI의 경우 최근 단독공장을 추가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소재 부문에서 LG화학은 4조원 이상을, 포스코퓨처엠은 2조원 이상을 들여 북미 양극재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동박의 경우 솔루스첨단소재가 퀘벡에 공장을 짓고 있고, SKC와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역시 북미 진출 타이밍을 잡는 중이다.
북미의 미래 시장성을 보고 막대한 투자가 결정됐다. 전기차 침투율의 경우 중국과 유럽은 20~30% 수준이지만, 미국은 아직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캐즘 속에서도 미국 전기차 시장 성장률은 상대적으로 견고할 것으로 관측된다. 시장조사기관 EV볼륨스에 따르면 올해 미국 전기차 수요는 전년 대비 70% 확대될 전망이다. 유럽은 20%, 중국은 14% 수준이다. 미국 정부가 배터리 기업 유치를 위해 제시한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상 AMPC(생산세액공제) 규모도 '조 단위'에 달한다.
무엇보다 북미에 중국을 겨냥한 높은 수준의 장벽이 마련되고 있다. 우선 IRA에 따른 FEOC(해외우려단체)를 통해 중국산 배터리 및 소재를 활용할 경우 전기차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했다. 또 미 정부는 중국산 전기차에 100%, 배터리에 25%에 달하는 관세 역시 부과키로 했다. 중국산 저가 배터리의 과잉공급이라는 글로벌 트렌드로부터 어느 정도 디커플링될 수 있는 환경이 북미에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북미에서 캐즘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투자한 금액을 고려할 때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미션이다. 올 연말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IRA와 같은 제도가 폐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게 중론이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부회장은 "K-배터리가 중국 배터리 공급망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 배터리 협력을 축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배터리 업계가 캐즘(chasm, 일시적 수요정체) 와중에도 북미 시장에서는 정면 돌파를 택하고 있다.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장을 향한 과감한 투자에 베팅하는 분위기다.
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은 당초 계획했던 올해 10조원 수준의 설비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수요부진에 직면한 유럽과 중국에 위치한 공장의 증설 속도를 조절하는 게 유력하다. 반면 총 352GWh(기가와트시)에 달하는 북미 생산라인 투자계획은 최대한 유지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북미 생산능력 확보를 위한 필수적 증설에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터리 3사 중 가장 설비투자에 보수적이었던 삼성SDI의 경우 최근 북미 진출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스텔란티스, GM 등과 함께 총 100GWh 규모의 합작공장을 짓고 있는데, 여기에 삼성SDI 단독공장 설립 역시 추진하는 중이다. 스텔란티스 합작 1공장의 경우 당초 가동 목표가 내년 1분기였는데, 이 일정을 올해 말로 앞당겼다.
SK온은 북미 조지아 공장(22GWh), 블루오벌SK(127GWh), 현대차 합작공장(35GWh)의 라인업을 구축한다. 특히 대규모 공장인 블루오벌SK가 가동되는 내년부터 본격적인 북미 시장 공략이 시작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북미에서 중국산 배터리를 쓰던 닛산이 IRA(인플레이션감축법)의 영향으로 SK온과 동맹을 맺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공장 한 곳마다 수 조원씩 하는 투자를 이렇게 한 지역에 대규모로 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사실상 사활을 걸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IRA에 따른 AMPC(생산세액공제) 수령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북미 진출을 서두르는 분위기다. AMPC는 배터리를 많이 만들수록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셀 35달러/kWh, 모듈 10달러/kWh) 구조다. 실제 삼성SDI의 경우 AMPC를 염두에 두고 스텔란티스 합작 1공장의 조기 가동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지난해에만 IRA에 따른 AMPC(생산세액공제)를 각각 6000억원 넘게 수령했고, 올해에는 '조 단위'의 혜택이 기대되고 있다.
북미 지역 역시 캐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향후 수요 회복세가 가장 강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글로벌 불황 속에서도 고용 시장이 가장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금리 인하시기가 도래할 경우 캐즘 극복 속도가 빠를 것이라는 평가다. 전기차 침투율이 유럽이나 중국과 달리 10% 미만이어서 잠재 수요도 가장 풍부하다. 북미 생산라인 확보를 위해 수 십 조원을 선제적으로 투자한 게 향후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현욱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2030년까지 전동화 비율 50% 달성 감안 시 북미 출신 완성차 기업들의 전기차 침투율 2~7%는 너무나도 낮은 수준"이라며 "전기차 라인업도 지난해 58종에서 2028년 154종으로 증가하는 만큼 배터리 수요도 비례하여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경민 기자 brown@mt.co.kr 박미리 기자 mil05@mt.co.kr 이세연 기자 2counti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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