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웅이 아니었으니까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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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께선 자식이 오랜만에 집을 방문할 때면 영웅님 얘기를 빠지지 않고 하신다.
꽃으로 그득하던 스마트폰 배경화면도 어느새 영웅님의 사진으로 바뀐 것을 보면, 모친의 삶에 영웅님은 꽃보다 뿌리 깊게 자리 잡았을 듯싶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물론, 승리했더라도 그것이 적잖이 쉽지 않았던 이들도 영웅님이 더 많은 좌석이 있는 공간에서 공연하기를 빈다.
그러니 그는 모친의 영웅이자, 나의 영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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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산 | 한겨레21부 탐사팀 기자
모친께선 자식이 오랜만에 집을 방문할 때면 영웅님 얘기를 빠지지 않고 하신다. 꽃으로 그득하던 스마트폰 배경화면도 어느새 영웅님의 사진으로 바뀐 것을 보면, 모친의 삶에 영웅님은 꽃보다 뿌리 깊게 자리 잡았을 듯싶다. 그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모친의 삶 구석구석을 알차게 채웠다. 이보다 더 큰 활력을 주는 건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모친의 세계에선 영웅님은 이름만 영웅은 아니었다.
한달 전쯤이었나, 모친은 서울에서 임영웅이 콘서트를 여는데 너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콘서트 비용쯤 부담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일이 콘서트 티켓을 따내야 하는 일이란 걸 알게 된 건 며칠 뒤 독촉(?) 비슷한 전화를 받은 뒤였다. 수강 신청, 축구 경기장 좌석 등 ‘클릭 경쟁’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기에 이 과제는 귀찮을 뿐이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라 여겼다. 게다가 상대는 고령층이었으니까.
티켓 구매가 열리는 정각, 재빠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자 내가 받은 대기열 숫자는 16만번대였다. 1만6천 아니었고, 16만이었다. 콘서트가 열리는 경기장의 좌석을 모두 다 채우고도 두바퀴를 더 돌아야 했다. 처참히 실패했다. 나보다 손가락이 빠른 트로트 팬들이 이렇게나 많았단 생각에 적잖이 당황했다. 겨우 들어가 고작 찾은 곳도 기둥에 가려져 영웅님을 제대로 영접할 수 없는 좌석뿐이었다. 그것마저도 망설이는 와중에 하나둘씩 사라졌다.
실패의 좌절을 맛본 뒤 깨달은 건 이건 영웅님 팬덤만의 경쟁이 아닌, 그들의 자식들도 참전해 겨루는 치열한 싸움이었단 사실이었다. 공연장 밖에서의 이 클릭 경쟁은 이른바 21세기 ‘효 쟁탈전’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러니 ‘나 이런 거 원래 잘해’라고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가짐으로는 이 효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물론, 승리했더라도 그것이 적잖이 쉽지 않았던 이들도 영웅님이 더 많은 좌석이 있는 공간에서 공연하기를 빈다. 그가 강한 체력을 갖고 더 자주 공연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너무 고된 활동을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행여나 번아웃이 와 공연을 못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무엇보다 그가 어떠한 사건·사고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이로써 난 임영웅의 노래를 듣지 않는 그의 가장 열성적인 팬 중의 한명이 됐다. 그러니 그는 모친의 영웅이자, 나의 영웅이기도 했다.
‘김호중 사건’을 보며 허탈함을 느끼는 건 팬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콘서트를 예약하고자 촌각을 다투던 나와 비슷한 그들의 가족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였겠다. 김호중이 아닌 임영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아니, 만약 모친이 김호중의 열렬한 팬이었다면 난 그런 모친이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응원할 순 없겠다 싶었다.
음주 사고 이후 뻔한 거짓말로 무마하려 했던 김호중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다. 그의 열렬한 팬을 제외하면 여론도 돌아섰다. 아마,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왜곡된 믿음이 최악의 행동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공연장 바깥의 수많은 존재에 대해선 간과한 듯하다. 팬덤만 바라본 김호중은 애초에 영웅이 될 수는 없었던 거다. 배트맨의 서사는 고담시에만 머물지 않는 법이니까.
kj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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