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영웅' 유상철, 별이 되다 [뉴스속오늘]

차유채 기자 2024. 6. 7.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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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2021년 6월 7일 췌장암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난 유상철 전(前)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사진=머니투데이 DB

2021년 6월 7일,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췌장암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

그라운드의 '유비'이자 전 국민을 환호하게 했던 '2002 월드컵의 영웅'이었고, '슛돌이 감독'을 맡으며 누구보다 다정한 면모를 자랑했던 그는 1년 반 이상을 병마와 싸우다 2002 한일월드컵 국가대표 선수 중 가장 먼저 사망했다.

고인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축구장에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드러냈기에, 많은 축구팬은 비통한 소식에 눈물을 보였다.

그의 '슛돌이' 시절 애제자였던 축구선수 이강인 역시 "유상철 감독님이 제가 월드컵 뛰는 것도 보시고 좋은 팀으로 이적한 것도 보셨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을 만났을 때 제 경기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셨는데 건강 때문에 이뤄질 수 없었다. 제가 좋은 축구선수로 크고 있는데 직접 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골키퍼 빼고 다 가능' 한국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울산 현대 선수 시절의 고(故) 유상철 감독 /사진=유튜브 채널 '울산 HD' 캡처

유상철은 단순히 성이 유씨라 유비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고인은 그라운드의 지략가로서 유비라는 별명에 걸맞은 플레이를 자랑했다.

1994년 K리그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해 입단 첫해부터 수비수 부문 K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고, 입단 2년 차에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해 울산의 첫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당시 유상철은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오른쪽 윙백, 왼쪽 윙백, 센터백 등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 고인은 득점왕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전 포지션에서 K리그 베스트11에 올랐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만능형 유틸리티 플레이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한국의 '루드 굴리트'였다.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시절의 고(故) 유상철 감독 /사진=유튜브 채널 'KBS 스포츠' 캡처


K리그를 점령한 유상철은 일본으로 무대를 넓혔다. 1999년 J리그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해 모든 포지션을 소화했다. 2000년에는 리그 22경기 17골로 득점 3위에 오르는 등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 시기 라리가 FC 바르셀로나가 유상철을 주목하기도 했다. 1998년 FC 바르셀로나는 유상철을 테스트하고 싶었으나, 유상철은 즉시 영입이 아닌 입단 테스트여서 이를 거부했다.

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인 로날드 쿠만은 2000년 네덜란드 리그의 피테서 아른험을 이끌 당시 유상철의 영입을 시도했으나, 이 역시 불발되고 말았다.

유상철은 이후 가시와 레이솔을 거쳐 울산 현대에 잠시 복귀했다가 2003년 요코하마의 리그 우승을 이끌고 2005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2006년 울산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원클럽맨' 의리를 지켰다.

코뼈 부러져도 헤딩골…전국민 울린 투지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멕시코전 당시 헤딩 경합을 하다 코뼈가 부러졌던 고(故) 유상철 감독 /사진=유튜브 채널 'KBS 스포츠' 캡처

유상철은 A매치 120경기(FIFA 공인 기록 기준) 18골을 넣으며 국가대표로서도 맹활약했다. 그의 투지는 대표팀에서 더욱 빛났다.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한일전 동점골,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동점골 등 그야말로 중요한 순간마다 '기적'을 써 내려갔다.

고인과 함께 대표팀 생활을 했던 홍명보 울산 HD 감독은 무엇보다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당시 유상철의 헤딩골에 찬사를 보냈다.

유상철은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멕시코전에서 코뼈가 부러진 상태로 헤딩골을 기록해 대한민국의 2대1 승리를 이끌었다. 많은 축구팬은 투지 가득한 유상철의 모습에 감동했고, 일각에서는 "유상철의 멕시코전 헤딩골이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시발점이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홍 감독 역시 이 장면을 유상철 관련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으로 꼽으며 "후배지만 진짜 대단하다. 대단한 선수라고 느꼈다"고 추억했다.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 당시 쐐기골을 기록한 고(故) 유상철 감독 /사진=유튜브 채널 'SBS 뉴스' 캡처


2002 한일월드컵 때는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후반 중거리 슈팅으로 쐐기골을 기록했다. 유상철은 이 골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리에 기여했고, 홍명보와 함께 2002 한일월드컵 베스트11에 선정됐다. 아시아 선수 중에선 이 두 사람뿐이었다.

영국의 축구 평론가 앤드류 워쇼는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라며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번호(6번)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감독 유상철에 2002 기적 찾아오길 바랐으나…
2011년 K리그 대전시티즌 감독으로 부임하던 당시 고(故) 유상철 감독의 모습 /사진=머니투데이 DB

유상철은 축구선수 은퇴 후 KBS 2TV 예능 '날아라 슛돌이' 감독,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 등을 맡으며 지도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2011년, 승부조작 파문으로 위기를 겪고 있던 K리그 대전시티즌의 제6대 감독을 맡으며 프로팀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수 시절과 달리 유상철의 감독 커리어는 원만하지 못했다.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서 4번의 준우승을 기록하긴 했으나 대전과 전남 드래곤즈 시절 모두 끝맺음이 좋지 못했다.

고 유상철 감독의 췌장암 투병 소식에 눈물을 보이는 축구선수 김호남, 당시 인천의 전략강화실장 이천수 /사진=유튜브 채널 'KBS 스포츠' 캡처


그렇게 2019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직이 그의 마지막 감독 커리어가 되고 말았다. 그간 그가 황달 증상을 앓고 있는 모습이 포착돼 건강악화 의혹이 제기됐는데, 알고 보니 췌장암이었던 것. 인천 선수들과 당시 인천 전력강화실장이었던 이천수는 팀이 강등권에서 탈출했음에도 오열하고 말았다.

2019년 11월 19일, 인천 유나이티드 측은 유상철이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축구팬들은 유상철에게 기적이 찾아오길 바랐고, J리그 팬들 역시 그의 쾌차를 기원했다.

2020년 11월, 암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희소식이 전해졌으나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추가적으로 하게 됐다. 유상철은 "조금 힘들더라도 이겨내면 좋아진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완치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2021년 6월 7일, 히딩크호에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됐다. 그의 사망에 FIFA 월드컵 측은 공식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한번 월드컵 영웅은 영원한 월드컵 영웅"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축구계뿐만 아니라 정치권, 연예계에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위) '날아라 슛돌이' 시절 유상철에게 지도받았던 이강인, (아래) 2021년 다시 만난 유상철과 이강인 /사진=유튜브 채널 'KBS 한국방송', '터치플레이' 캡처


특히 이강인의 추모가 많은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유상철은 '날아라 슛돌이'를 통해 이강인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굴했고, 이강인의 스페인 진출을 조언하기도 했다.

유상철은 투병 중에도 "건강하게 일주일을 보낼 수 있다면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강인이가 하는 경기를 직접 현장에서 보고 싶다"며 제자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강인은 유상철에게 "다시 제 감독을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강인은 "베푸셨던 드높은 은혜에 (제가) 보답해 드리기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셔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이 감독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계신 곳에서 꼭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추모했다.

차유채 기자 jejuflow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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