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쳐 돌아가는 세계”에 대한 우리 나름의 순정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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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댕기', '윙크', '이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창간된 소녀 만화 잡지들의 이름을 별처럼 헤아리면 내 소녀 시절이 떠오른다.
이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순정 만화의 재평가와도 관련이 있다.
"순정"이란 단어의 표면적 의미인 연애 감정은 소녀들이 읽는 만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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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헴 폴리스 2049
박애진 지음 l 폴라북스(2024)
‘르네상스’, ‘댕기’, ‘윙크’, ‘이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창간된 소녀 만화 잡지들의 이름을 별처럼 헤아리면 내 소녀 시절이 떠오른다. 잡지가 출간되는 날짜에 맞춰 서점으로 뛰어가던 날들은 지난 세기의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 본 만화들은 아직도 나의 핏속에 흐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묻는다면, 강경옥 작가의 ‘라비헴 폴리스’를 꼽겠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소프트 에스에프(SF) 만화로, 미래 도시 라비헴에서 근무하는 두 경찰이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작품 전반에 깔린 하드보일드적 서정이 아름답다.
그러기에 순정 만화를 에스에프 소설로 재해석하는 컬래버레이션 시리즈에서 첫 작품이 ‘라비헴 폴리스 2049’인 건 놀랍지 않다. 주인공 하이아 리안과 라인 킬트는 독자적인 캐릭터이고, 옴니버스식 구성 속에 그려지는 여러 사람들의 심리는 현재 한국 에스에프 소설들의 정서적 원류이다. 연재 당시에는 2025년이 배경이었지만, 소설은 2049년이라고 표시한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미래가 현재가 되자, 세계에 대한 전망도 달라졌다.
따라서 ‘라비헴 폴리스 2049’는 원작의 인물 구도를 가져왔지만, 그의 재현으로 보이진 않는다. 원작이 강경옥 작가 특유의 세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미래에도 여전한 인간의 마음을 파고든다면, 이 에스에프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에서의 계급 담론을 끌어내는 데 초점이 있다. 미래가 오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현대의 문제들, 소셜 미디어에 유통되는 가짜 뉴스와 언론 재판, 빈곤과 인간 소외, 정치와 결탁한 자본의 착취는 그대로다. 소설에서는 라비헴 옆 라마스 지구라는 메가슬럼 지역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투쟁이 중점 사건이고, 경찰로서 그들을 대면해야 하는 하이아와 라인에게는 존재적 고민이 일어난다.
원래의 ‘라비헴 폴리스’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한 떨칠 수 없는 인간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작은 그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타인의 의도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려는 여자 하이아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섬세한 남자 라인 사이의 파트너 의식을 그렸다. ‘라비헴 폴리스 2049’는 이제 결합한 두 사람이 다른 약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작가의 말에 있듯이, 원작과 ‘라비헴 폴리스 2049’는 평행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건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만, 한국 에스에프 서사의 흐름 속에서는 개인에서 다수로의 확장을 추구하며 연결을 맺는다.
이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 순정 만화의 재평가와도 관련이 있다. “순정”이란 단어의 표면적 의미인 연애 감정은 소녀들이 읽는 만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테르미도르’를 보고 시민 저항의 역사를 배웠고, ‘호텔 아프리카’에서는 약하고 선량한 이들이 서로 감싸 안는 삶의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수많은 만화에서 용감한 소녀왕들을 만났다. 이제 그 소녀들이 자라 혁명에 관해 쓴다. 물론 이런 시도가 이 “미쳐 돌아가는 세계”에 대한 우리 나름의 순정이라고 한다면 장르 이름이 영 어긋난 것만은 아니리라. 함께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이들의 순정. 프로젝트의 다음 작품인 ‘2023년생’과 ‘달의 뒷면을 걷다’를 기대해본다.
박현주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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