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다면 살아남겠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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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집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었다.
아주 어렸지만 산 넘고 물 건너 할머니네 집에 도착해 먹었던 두부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막손이가 만든 조선두부도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딱딱하고 맛없는 일본두부와 달리 호인 아재가 만든 조선두부는 인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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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손이 두부
모세영 지음, 강전희 그림 l 비룡소(2023)
할머니는 집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었다. 아주 어렸지만 산 넘고 물 건너 할머니네 집에 도착해 먹었던 두부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갓 만들어진 따뜻한 두부는 포슬포슬하고 고소했다. 막손이가 만든 조선두부도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막손이 두부’는 조선두부를 일본에 전래한 이야기를 담은 역사동화다. ‘히스토리컬 픽션’ 장르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뼈대를 만든 다음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완성해낸다. 모세영 작가는 짧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고 4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함락되자 박호인(朴好仁)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시코쿠의 남쪽 고치에 조선인 집단촌을 만든다. 그가 바로 조선두부를 일본에 전래한 실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동화 속 막손이의 아비는 진주 도공이었다. 일본으로 끌려가다 배 안에서 죽자 막손이는 고아 신세가 된다. 조선인 도공장 아래서 일을 거들다 곧 하급 무사의 집에 노비로 보내진다. 신지 부인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막손이는 의병 활동을 하다 일본으로 끌려온 호인 아재를 만난다. 아재 역시 노비로 일하며 조선두부를 만들고 있었다. 딱딱하고 맛없는 일본두부와 달리 호인 아재가 만든 조선두부는 인기가 좋았다. 도공의 후예답게 눈썰미가 뛰어난 막손이는 아재의 일을 도우며 두부 만드는 법을 익힌다. 이야기는 하급 무사 겐조가 두부 만드는 솜씨가 뛰어난 막손이를 납치해 제 잇속을 챙기려 들며 다급하게 흐른다. 친구인 아키라와 료코는 이 사실을 눈치채고 막손이를 돕고, 이 과정에서 막손이와 호인 아재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인다.
‘막손이 두부’는 대개의 창작역사동화가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에서 소재를 가져왔던 전례를 탈피한다. 일본을 배경으로 조선두부의 전래과정을 다룬다. 의외일 수 있는 이 선택은 역사 부교재라는 한계를 벗어나 전복적 상상력을 펼쳐낼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당대의 인식과 한계를 넘어서기 참으로 어렵다. 같은 이야기라도 새롭게 쓰여야 하는 이유다. 막손이가 뻔한 결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다른 선택을 한 것이 좋은 예다.
호인 아재는 목숨을 걸고 왜놈과 싸우며 나라를 지킨 의병이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재의 유일무이한 소원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 끌려갔다가 어렵사리 돌아간 조선인을 받아주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 여인 중 환국한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문을 수치스럽게 했다는 오명을 쓰고 사라져야만 했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않는 일은 어제도 오늘도 반복된다.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막손이는 호인 아재에게 “배 위에서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저는 다른 아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조선인도 왜인도 아닌 도래인이 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부모를 잃은 것처럼 나라를 잃”은 막손이를 버티게 한 건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막손이는 일본과 조선이라는 뻔한 경계 안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다. 막손이를 생존 의지를 버리지 않은 현재적인 캐릭터로 조명한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다. 초등 고학년.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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