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 유물론에서 끌어낸 낯선 신학 [책&생각]

고명섭 기자 2024. 6. 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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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종교철학자 애덤 밀러
유물론적 신학의 놀라운 풍경 제시
“만물은 고난 속에 은혜를 주고받고
신은 만물 안에 만물과 함께 있다”
미국 종교철학자 애덤 밀러.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변적 은혜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신학
애덤 S. 밀러 지음 , 안호성 옮김 l 갈무리 l 1만 8000원

21세기 철학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유물론의 귀환과 함께 신학의 귀환을 꼽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유물론이 오랫동안 대척 관계에 있던 신학과 결합해 ‘유물론적 신학’이라고 부를 만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종교철학자 애덤 밀러(48)가 쓴 ‘사변적 은혜’(2013)는 신유물론 철학의 대부인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의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신학의 구성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특히 이 책은 그동안 기독교적 개념으로 이해돼 온 ‘은혜’(grace, charis)를 전통 신학의 틀에서 끌어내 라투르의 신유물론적 구도 속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밀러가 구사하는 서술 방식의 특징은 라투르 사상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그 사상에서 밀러 자신의 신학적‧종교적 명제를 끄집어낸다는 데 있다. 라투르의 철학 이론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행위자’(actor)는 신유물론에서 흔히 ‘객체’로 호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라투르가 객체를 행위자로 부르는 것은 이 객체가 전통적인 객체와 달리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객체 곧 행위자는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며 생물과 무생물을 포괄한다. 자연 세계의 모든 것이 능동적 행위자다. 이 객체들은 언제나 다른 객체들과 연결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네트워크는 거시와 미시를 가리지 않고 모든 차원을 망라한다. 원자들은 아원자들의 네트워크이며, 인간은 세포들의 네트워크다. 지구도 인간과 비인간의 거대한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객체는 또 다른 네트워크에 참여해 더 큰 객체를 이룬다. 네트워크는 무한소에서 무한대로 무한히 이어진다. 객체들은 이 네트워크에 참여함으로써 객체가 된다. 동시에 객체는 네트워크에 참여하더라도 자신의 ‘고유성’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네트워크도 객체를 모조리 흡수할 수 없다. 이것이 라투르 철학의 토대가 되는 ‘비환원 원리’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위키미디어 코먼스

라투르는 그 비환원 원리를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을 직접 밝힌 바 있는데, 이 책은 그 깨달음의 체험을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예수를 만나 회심한 사건에 견준다. 그 사건이 일어난 때가 라투르가 25살 때인 1972년이었다. 당시 라투르는 환원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환원주의란 모든 것을 환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초월적인 일자나 근본적인 원리를 상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세계를 무에서 창조한 유일신을 상정하고, 천문학자는 우주 전체를 출현시킨 빅뱅이라는 기원을 상정하며, 철학자는 모든 현상을 하나로 꿰뚫어 설명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상정한다.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원리‧기원‧일자로 되돌리는 사고방식이 환원주의다. 그런데 1972년 겨울 어느 날 디종에서 그레이로 가던 길에 라투르는 그 환원주의가 틀렸으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그런 일자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이 열렸다. 거기서 얻어낸 것이 ‘비환원의 원리’다. 어떤 객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통일하고 장악하는 초월자는 없다. 후에 라투르는 이 비환원의 원리를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 적용한다. 객체는 네트워크에 참여하지만, 네트워크로 해소되지 않는다.

라투르의 이 비환원 원리에서 밀러는 ‘저항’(resistance)과 ‘이용 가능성’(availability)이라는 아이디어를 이끌어낸다. ‘이용 가능성’이란 객체가 다른 객체들에게 자신을 이용하도록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객체는 네트워크에 연결돼 그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쓰인다. 동시에 객체는 자신을 네트워크에 내어주더라도 네트워크에 흡수돼 사라지지 않고 그 자신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네트워크의 환원에 맞서는 것이 ‘저항’이다. 객체는 네트워크에 자신을 내어주면서 동시에 그 네트워크에 저항한다. 모든 객체는 ‘저항’과 ‘이용 가능성’이 결합된 ‘저항적 이용 가능성’이라는 ‘이중구속’ 상태에 있다. 이 이중구속 상태가 모든 객체의 본질적 상태다. 객체들의 네트워크는 각각의 객체가 이 이중구속 상태에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함으로써 그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인체를 사례로 들어보자. 인체는 외부의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 그러나 음식을 이루는 객체들은 인체 안에 들어와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또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들도 각자가 자신을 내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체라는 네트워크에 저항해 자신을 지키기도 한다. 이 이중구속의 긴장 속에서 인체가 인체로서 유지된다.

밀러는 ‘저항적 이용 가능성’이라는 객체의 이 본질적 조건에서 ‘은혜’를 발견한다. 은혜란 객체가 자신을 다른 객체에게 무상으로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객체가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네트워크는 존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네트워크는 다른 더 큰 네트워크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은혜를 베푼다. 이 은혜와 짝을 이루는 것이 ‘고난’이다. 객체가 자신을 다른 객체에 내어주기에, ‘은혜를 베풂’은 ‘고난을 겪음’이 된다. 동시에 이 객체는 언제나 다른 객체를 자기 유지에 이용하는데, 그때마다 그 다른 객체의 저항을 견뎌내야 한다. 이렇게 저항에 부닥쳐 그 저항을 견디는 것이 또한 고난이다. 나를 넘겨주는 것도 고난이고 저항을 견디는 것도 고난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고난을 견디는 것이다.” 객체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세계는 모든 수준에서 은혜와 고난으로 점철돼 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밀러는 죄란 ‘저항적 이용 가능성에 대한 거부’라고 말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것도 거부하고 타자의 저항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죄다.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고 홀로 자유로운 주권자로 있으려는 의지야말로 죄다. 이 의지를 꺾어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하는 일이라고 밀러는 말한다. 밀러의 그 종교에는 모든 것 위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신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초월적인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모습의 신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신은 객체들의 세계 안에서 다른 객체들처럼 은혜를 베풀고 고난을 겪는 신이다. 밀러는 우리 각자는 다른 객체들의 은혜 없이는 스스로 설 수 없을 만큼 약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신은 그 약함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신과 함께 우리는 서로 은혜를 베풀고 고난을 겪으며 존재한다고 밀러의 낯선 신학은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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