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섯 현역시인 황동규, 하늘빛 장정에 담은 ‘묘비명’ [책&생각]
‘어떤 개인 날’ 이래 18번째 시집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가만한 욕망’ 치열한 시로
봄비를 맞다
황동규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2000원
어느 늙은 시인의 시집은 풋풋한 하늘빛 장정을 두르고서, 제목 ‘묘비명’이란 시도 품고 있다.
“극락전에 맴돌던 호랑나비가/ 꿈속까지 날아와 춤을 췄지만/ 극락을 꿈꾼 적은 없었다./ 삼인칭들끼리 모여 사는 곳으로 갔다.”
극락은 탐낸 적 없거니와 바란다면 죽음은 엄습하지 않아 죽음에 성습(버릇이 들다)하는 일이다. 때문에 시집엔 비애나 연민, 과장이 드물다. 초탈이네 경지네 치장이 없다. 노 시인은 한겨레에 “삶이 주는 조그만 즐거움 누리다 가겠다 그런 뜻”이라 ‘묘비명’을 부연했다. 그 말은 하도 진솔하여 맹렬하다. 삶을 삶으로 감당할 뿐이다. 여든여섯 현역시인 황동규와 신작 시집 ‘봄비를 맞다’ 얘기다. 시인을 5일 해거름 만났고, 초점 없이 붐비던 퇴근길 맨 나중 문답을 맨 먼저 써야겠다 생각했다.
―늙음과 죽음은 무엇입니까.
“둘 다 모르는 게 매력이지요. 그보다 중요한 건 삶이니까. 인간답게 사는 것. 그게 불가능하면 죽는 게 낫지. 제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은 나이 들게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늙음의 보상 가운데 하나지.”
시집은 2020년 펴낸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후 4년 만이다. 두 시집은 생애주기적 연작이겠으나, 퍽 달리 보인다. 비유하자면, 바람 따라 흘리던 ‘연’을 시인은 새삼 감고 풀고 당기고 내둔다. 망연한 줄이 “가만” 팽팽하다.
“그의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이가 은퇴하고도 늘 바깥일이 있었는데/ 지난 사흘째 도무지 말을 않고 집에 있네요.’/…//…// 나도 화가 나서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은 적 있었지./ 그 하루 온통 하나의 절벽이었어./ 하, 어이없이 주저앉는 자신에게 그가 단단히 화났구나./…/ 봄이 와도 물오르지 않는 마른풀 된 게 못 견디겠는 거지.”(‘봄 저녁에’ 중,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봄이 바뀐다.
“…/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표제시 ‘봄비를 맞다’ 중)
이 변화가 집착의 소치라면, ‘묘비명’이 불가했겠다. 이런 시도 안 된다.
“지방 강연 끝낸 후 뒤풀이 자리에서 그 지역 신문기자가/ …물었다./ 혹시 돌아가실 때 하실 말씀/ 준비된 게 있습니까?/…/ ‘만족스럽습니다.’/…/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다시 답했다./ ‘살아 있는 게 아직 유혹일 때 갑니다.’”(‘뒤풀이 자리에서’ 중)
여든 넘어 맞닥뜨린 코로나 팬데믹이 시인에게 중대한 시적 변고였다.
―두 시집은 텐션(긴장도)부터 다릅니다. 시인께 이번 시집은 전과 무엇이 다릅니까.
“더 치열해졌지. 시에 대한 만족이 늦춰지고. 예전 만족했던 선을 넘어서려고 더 밀었어요.”
―지난 4년 어땠길래요.
“늙음의 고통과 불편, 이상 뭐가 더 있겠어요. 젊은이들은 모를 거야. 팔십 넘은 사람 네 명 중 한 명이 죽고 두 명은 살더라도 무지 고통스러웠어. 깨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코로나가 없었다면 지금 시집은 없었을 겁니다. 삶의 고통을 덜 경험했을 테니까요.”
죽음의 실체는 삶의 면목을 드러낸다. 선명한 공포와 속수무책을 시인은 “기록하려고” 시 몇 편에 날을 새겼다. ‘서달산 문답’ ‘눈물’ 등에 마지막 행처럼 쓴 “2021. 8.”이 고통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런 상태겠다.
“8년 전 세상 뜬 친구 김치수, 꿈에 나타났다./ 나 그 글 읽었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거냐?/ 대답 대신 지공다스 한 병 내밀었다./ 마스크 없이.//…// 아침이 가고 저녁이 온다/ 혼자 있음./ 혼자 없음./ 지내다 보니/ 있음이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 마지막 시 쓰기 딱 좋은 저녁이 올 것이다.”(‘코로나의 파편들’ 중)
“…/ 입맛이 나가고/ 건성건성이 집 안에 자리 잡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음의 둔주곡이다.//…// 건성건성은 소리도 빛도 땜질 자국도 없다.”(‘건성건성’ 중)
시인은 고교 시절 작곡가를 꿈꿨다. 포기하고 영문학자 시인 되어 도달한 차원이 ‘극서정시’다. 서정은 소년의 욕망인 셈이다. 그 좋아하던 사람과 그 좋아하던 풍경과 그 좋아하던 서정으로부터 유리된 시간, “다 사라졌다”는 것들과 제 “지문”처럼 지워진 것들을 시인은 “가만” 본다. “가만, 바다와 모래밭 구도가 바뀌고 있다” “가만, 발코니에 내놔야 할까 보다”…. 간과됐던 삶의 주름들이 펴지는 동태이고 욕망이고, 그것들의 속도가 “가만,”이다. “병원 예약이 식사 약속을 넘본다”(‘병원을 노래하다’)는 시기, 베란다에 시 있고 32년 산 서울 사당동의 뒷골목에 키 낮은 서달산 산길에도 시가 있어, 가만 “시야가 환해”(‘어떤 동짓날’)지는 시간을 맞는다.
그는 1978년 출시한 문학과지성 시인선에서 역대 가장 많은 시집(14종)을 냈다. 최연소 등단 기록(20살, 1958)도 여태 그의 것이다. 문지는 새 시대 문학을 기치로, 그보다 윗세대의 시집을 낸 적 없다. 시인의 5번째, 문지의 1호 시집이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속 ‘계엄령 속의 눈’ 경우 신문에선 “흙빛 눈”으로 소개되어야 했던 시대로부터 시인은 많고 시는 길어졌으며 노 시인이 보기에 어려워졌다. 황지우, 이성복이 “너무 일찍 시를 놓아” 아쉽다.
이번 시집엔 불국사 두 탑을 언제 다시 보겠는가 기회를 놓쳤다며 애태우는 노래가 있다. “두 탑이 이중창하듯 말했지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그리움을 그리워 말게.” 아니, 그러고선 바로 다음 시편(‘그날 저녁’)에서 “참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실토하니, 시인은 치열하게 시와 욕망 중이다. “해그림자 보며 밥때 기다리던 아이”, 가만 늙은 소년의 마음처럼 말이다.
―최근 신경림(1936~2024) 시인 장례가 있었습니다.
“부의만 했어요. 척추협착이 너무 심했습니다. 리듬이 참 좋고 ‘농무’처럼 광경을 그리는 데도 비상해서 그 시인 시상을 좋아합니다.”
둘은 문지와 창비 시집의 기준이었으나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삼인칭들끼리 모여 사는 곳”이라면 모를까.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오색빛으로’ 중)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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