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임신중지, 교회, 그리고 으르렁거리며 웃기 [책&생각]

한겨레 2024. 6. 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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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뭐 읽어?" 칼리의 질문에 능청스럽게 답한다.

"좆 잡고 반성해.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고." 놀란 칼리에게 나는 웃으며 책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나온 대사야." 다음 대사를 궁금해하는 칼리와 함께 번갈아 가며 책을 읽는다.

나는 책을 읽으며 으르렁 웃는 혁명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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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에 미친 혜인이
이오진 희곡집
이오진 지음 l 제철소(2023)

“언니, 뭐 읽어?” 칼리의 질문에 능청스럽게 답한다. “좆 잡고 반성해.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고.” 놀란 칼리에게 나는 웃으며 책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나온 대사야.” 다음 대사를 궁금해하는 칼리와 함께 번갈아 가며 책을 읽는다. 어느새 나와 칼리는 다른 인물이 된다.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이 바뀐다. 무대가 펼쳐진다. 요즘 내가 푹 빠진 희곡의 매력이다.

나에게 희곡은 시와 소설, 수필에 비해 문턱 높게 느껴지는 장르였다. 최근까지도 희곡과 희극을 헷갈릴 정도였다. 어학사전에서 희곡을 검색하면,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대화로 표현하는 예술 작품’이라는 뜻이 나온다. 영어로 번역하면 ‘Play(플레이)’라고 한다. 움직이고 행동하고 노는 것. 그 모든 게 희곡 안에 들어 있다. 요즘에는 이오진 작가의 희곡집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를 2주 넘게 들고 다닌다. 책에는 다섯 개의 단편이 담겨 있다. 각 장에는 부정의에 으르렁거리는 풍자와 해학이 녹아 있다.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고 했던가. 나는 책을 읽으며 으르렁 웃는 혁명을 상상했다.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는 제목부터 궁금증을 부른다. 사뭇 긴장하며 페이지를 펼치자, 교회 청년부에 속한 혜인과 혜인의 남자친구 예수가 등장한다. 예수가 콘돔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임신한 혜인은 인공 임신 중지를 선택한다. 예수는 혜인에게 상의 없이 교인들에게 죄를 고한다. 혜인과 섹스한 죄, 혜인이 임신 중지한 죄. 교인들은 예수를 동정하며 혜인과 거리를 둔다. 졸지에 죄인이 된 혜인은 예정된 단기 선교도 가지 말라는 명령을 듣는다. 혜인이 목사에게 왜 예수는 되고 자기는 갈 수 없느냐 따지자, “네가 우리 교회를 흔들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목사와 교회 사람들의 태도에 분노할 때마다 ‘미친 혜인이’는 으르렁거린다. 혜인이 예수에게 “섹스는 같이 했는데, 요새 보면 나 혼자 임신했던 거 같다”고 말하자 예수는 수치스럽다는 듯 ‘그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한다. 혜인은 답한다. “섹스, 섹스, 섹스, 섹스, 섹스, 섹스. 보지, 자지, 보지, 자지, 보지, 자지.” 그리고 행동한다. “혜인, 양손으로 성행위 하는 모양을 만들어서 탁탁 친다.”(135쪽)

한 장면만 더. 이번에는 ‘하나님’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다. 혜인은 목사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성관계는 더러운 거라며 죄의식을 키우고, 자기를 죄인으로 밀어낸 걸 사과하라고. “주일날, 공동체 앞에서 설교할 때 사과해.” 옆에 있던 하나님이 혜인을 거든다. “우재야, 네가 사과해야 돼. 네가 잘못했어.” 목사의 이름은 우재. 하나님은 사람들이 수감된 것처럼 자신에게 복종하길 원한 적이 없다며 우재 앞에서 억울해한다.

내 거친 요약은 희곡에 대한 실례다. 실례인 걸 알면서 작은 조각을 가져왔다.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로 이루어진 책을 통과하며, 슬픔과 분노를 품은 웃음의 힘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의에 정직하게 으르렁거리며 ‘하하’ 웃는 일은 이상해서 멋있다. 게다가 매일의 차별과 불의에 지쳐버린 우리가 잠시 자기 자리를 비워 희곡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희곡이 선물하는 호흡과 풍자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책하는 사람, 후회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내몰린 사람. 그 모든 사람이 되고, 또 그와 대화하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세계, 호흡하는 언어와 으르렁거리는 웃음이 펼쳐진 그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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