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살인…통째 구워질 것인가, 아니면 행동할 것인가 [책&생각]

최재봉 기자 2024. 6. 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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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 폭염과 온난화 고발
가난할수록 더 취약한 현실
식량생산 차질, 감염병 위험도
게티이미지뱅크

폭염 살인
폭주하는 더위는 어떻게 우리 삶을 파괴하는가
제프 구델 지음, 왕수민 옮김 l 웅진지식하우스 l 2만3000원

2021년 8월16일 한국계 미국 여성 엘런 정과 남편 조너선 게리시, 그들의 한 살배기 딸 미주가 요세미티에서 가까운 집 근처 산길을 걷다가 열기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여덟 살짜리 반려견 오스키도 함께 변을 당했다. 이날 이른 아침 집에서 출발한 일가족은 5분간 차를 달려 7시30분께 등산로 초입에 내렸다. 첫 번째 셀카를 찍은 7시44분 무렵 온도는 21℃ 정도였고, 이들은 10여 킬로미터의 코스를 5시간여에 걸쳐 주파하고 오후 1시께에는 귀갓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한 시간 남짓 내리막길을 걸어 강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이들이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한 10시29분, 기온은 급상승해 38℃에 육박했다. 문제는 2018년의 대규모 산불로 나무들이 모두 불타 버려 등산로에 열기를 피할 그늘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힘겹게 3킬로미터 정도를 오르다가 위기감을 느낀 게리시는 휴대전화로 구조 요청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오전 11시56분, 당시의 기온은 41.6℃였다. 그러나 서비스 가능 지역이 아니었던 탓에 문자도, 이후의 다섯 번에 걸친 통화 시도도 불발에 그쳤고, 가족은 결국 이튿날 오전에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환경적 노출에 따른 이상 고열과 그로 인한 탈수증”을 사인으로 발표했다.

미국의 기후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이 쓴 ‘폭염 살인’에 나오는 사례다. 이 책이 출간된 2023년은 산업혁명 이후 가장 뜨거운 해로 기록된 터라 책의 ‘예견’이 화제가 되었다지만, 해마다 최고 온도 기록을 경신하다시피 하는 이즈음의 상황을 놓고 보자면 그런 화제가 오히려 새삼스럽다 싶기도 하다. 책에도 나오듯 “2014년에서 2022년은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기간으로 기록되었”고, 바다 역시 “2022년에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것으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요컨대 폭염은 더 이상 예외적인 기상 현상이 아니라 상시적 조건으로 우리 가까이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 할 테다. 우리나라만 해도 올 여름 기온이 평년보다 높을 확률이 큰 것으로 예보되었다.

과테말라에서 온 이주 노동자 세바스티안 페레즈는 2021년 6월, 미국 오리건주의 한 농장에서 40℃를 넘는 폭염 속에 일을 하던 중 쓰러져 숨지고 말았다. 비슷한 무렵 역시 오리건주의 월마트 창고에서는 51살 노동자 켄턴 스콧 크럽이 숨진 채 발견됐다. 같은 주 힐스버러에서는 지붕 공사를 하던 인부가 작업 도중 쓰러져서 그대로 사망했다. 택배 기사인 24살 에스테반 데이비드 차베스 주니어는 캘리포니아에서 물건을 배달하던 중 사망했다. 카타르에서는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경기장과 호텔 등을 짓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가 열노출로 목숨을 잃었다.

지은이는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폭염의 현장을 기록한다. 일주일 내내 기온이 52.2℃를 돌파한 파키스탄의 자코바바드, 2022년의 폭염으로 기온이 무려 21.1℃까지 오른 남극, 지구 최대 규모의 산호초인 남태평양의 그레이트배리어리프, 2003년 폭염으로 도심에서만 1천명이 사망한 프랑스 파리, 지구의 나머지 지역보다 온난화가 4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북극 등의 현실이 생생하고 긴박하게 묘사된다. 폭염으로 인한 인명 손실이 부각되지만, 사실 폭염은 지구 온난화라는 더 크고 심각한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2019년에만 더위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48만9천명에 달했다. 이는 허리케인과 산불을 비롯한 다른 모든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를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전 세계적으로 건물에서 사용되는 전체 전기 사용량 중 에어컨 가동에만 거의 20퍼센트가 할당된다. 그러나 에어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기의 상당 부분은 화석연료를 태워서 생산되고, 화석연료를 태우면 그만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져 기후는 더 뜨거워지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에어컨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지은이는 강조한다. “에어컨은 절대 냉방 기술이 아니다. 에어컨은 단순히 열기의 위치를 바꿔주는 도구일 뿐이다.” 게다가 빈곤층은 에어컨의 혜택을 보지 못하면서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한다.

살인적인 더위 속에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현한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픽사베이

지구의 온도를 낮추는 데에는 나무들이 큰 역할을 한다.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내뱉기 때문에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는데다 땅에서 물을 빨아들여 잎으로 배출함으로써 공기를 시원하게 만든다. 가지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토양에도 그늘을 드리워서 증발에 따른 수분 손실을 줄여준다. “나무들이야말로 기후 싸움의 슈퍼히어로들이다.” 폭염이 한창이던 무렵, 나무는 보기 힘들고 온통 콘크리트투성이였던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빈민가 렌츠의 기온은 무려 51.1℃였던 반면, 곳곳에 공원과 녹지가 조성돼 있고 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고급 주택가 윌래밋하이츠의 기온은 37.2℃였다. “폭염 속에서도 부자들은 약 15℃를 더 시원하게 지낼 여력이 있는 셈이다.”

온난화는 식량 생산에도 차질을 빚는다. 지구 평균 기온이 1℃씩 오를 때마다 옥수수는 7퍼센트, 밀은 6퍼센트, 쌀은 3퍼센트씩 수확량이 줄어든다는 예측도 나왔다. 온난화는 영구동토층 얼음 밑에 갇혀 있던 병원체들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야생에서 밀려난 동물들이 인간의 거주지 가까이로 옮겨 오면서 코로나19보다 무시무시한 병원체들이 창궐할 가능성이 있다. ‘폭염 살인’의 끔찍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를 나열한 지은이는 나름의 대안 역시 제시한다. 고도 비행 항공기 선단으로 성층권 상부에 황산염 입자를 살포해서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린다는 구상이 있는가 하면, 청계천을 비롯한 생태계 복원 사례들이 소개되고, 2026년까지 17만 그루의 나무를 심기로 한 파리시의 계획도 거론한다. 지은이가 만난 파리 시의원 알렉상드르 플로랑탱의 말이 책의 주제를 요약한다. “통째로 구워질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행동할 것인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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