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신용 1등급’… 920점도 “대출 안 나온다고요?”

김지섭 기자 2024. 6.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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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문턱만 높이는 ‘신용 인플레’
일러스트=양진경

대기업에 다니는 A씨는 지난 4월 한 시중은행에서 5000만원을 신용 대출로 빌리려 했다가 심사에서 탈락했다. A씨는 연봉이 1억원 가까이 되고, 연체 기록도 없었다. A씨 신용 점수는 신용 평가사 KCB(코리아크레딧뷰로) 기준 1000점 만점에 920점으로 꽤 높은 편이었다. A씨는 “은행에선 신파일러(thin filer·금융 이력 부족자)여서 대출이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며 “신용도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대출이 안 나와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최근 금융 소비자들의 신용도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신용 점수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일부 고신용자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과거 신용 점수는 1000점 만점에 900점만 넘으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젠 950점은 넘어야 고신용자로 보는 분위기다. 신용도를 올리는 각종 노하우가 퍼지고, 신용 점수를 관리해 주는 전용 앱이 나오는 등 고신용자 되기가 한층 수월해진 것이 신용 점수 인플레를 일으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양진경

◇늘어나는 900점 이상 고신용자들

6일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국내 5대 은행에서 지난 4월 개인 신용 대출을 받은 이들의 평균 신용 점수는 926.2점(KCB 기준)이다. 1년 전(917.6점)보다 9점 가까이 상승했다. 5대 은행 신용 대출자의 평균 신용 점수는 2022년 12월만 해도 903.8점이었는데 1년 4개월 만에 23점쯤 올랐다.

은행별로 보면, NH농협은행 신용 대출자의 평균 신용 점수가 940점으로 가장 높았다. 이어 하나은행(933점), 우리은행(929점), KB국민은행(915점), 신한은행(914점) 순이었다. 과거 시행하다 2021년 없어진 1~10등급의 신용 등급제 기준 1등급(KCB 신용 점수 942점 이상)에 해당해도 이제 일부 은행에선 대출받는 것을 장담하기 어렵다.

신용 점수 인플레는 신용 점수대별 비율로도 확인할 수 있다. KCB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신용 점수 950점 이상인 사람은 전체 신용 점수 산정 대상자(4953만3733명)의 27%인 1314만6532명에 달한다. 2020년 말엔 21%였는데 3년 만에 6%포인트 상승했다.

중·저신용자 대출 비율이 높은 인터넷 은행도 마찬가지다. 카카오뱅크·케이뱅크·토스뱅크 등 인터넷 은행 3사의 지난 4월 신용 대출 평균 신용 점수는 924.7점으로 작년 4월(903.3점)보다 20점 넘게 상승했다. 특히 케이뱅크의 4월 신용 대출 평균 신용 점수는 1년 전(909점)보다 42점이나 오른 951점으로, 은행권을 통틀어 가장 높았다.

◇신용 관리 노하우 확산, 신용 점수 인플레 불러

금융권에선 신용 점수 인플레 배경으로 신용 점수 관리법이 확산하는 점을 꼽는다.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엔 ‘신용도 올리기’ ‘고신용자로 신분 상승’ 등의 제목을 단 글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 신용 성향 설문 조사에 참여하거나 국민연금·통신비·공과금 등의 납부 내역을 신용 평가사에 제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점수를 올릴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신용도를 높여주는 핀테크(금융+테크) 앱도 등장했다. 최근 토스는 나이스평가정보와 제휴를 맺고 개인 맞춤형 신용 관리 서비스인 ‘신용플러스’ 멤버십을 출시했다. 월 1900원을 내면 신용 점수 올리는 법을 대출, 카드 사용 내역 등에 맞춰 알려준다. 추가 대출을 받으면 신용 점수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계산할 수 있다.

은행권의 대출 연체율이 상승하면서 외부 신용 평가사 데이터에 연연하지 않고, 은행 내부 기준에 따라 깐깐하게 대출을 심사하는 것도 은행권의 ‘신용 점수 커트라인’이 높아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 지난 3월말 기준 국내 은행 가계 신용 대출 연체율은 0.73%로 지난 2년 사이 2.4배쯤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신용 점수 인플레로 일부 고신용자가 카드사, 저축은행 등 2금융권으로 밀리면서 중·저신용자들이 대출받기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민환 인하대 교수는 “차주(借主)의 소득 여건 등을 정확히 파악해 단지 신용 점수가 낮다고 해서 대출 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당국이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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