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돼 돌아오는 ‘해외 입양인’… 그들 두 번 외면하는 한국
가난한 대한민국은 아이들을 비행기 태워 입양 보냈다. 1953년 혼혈 아동 등 4명을 ‘아버지 나라’ 미국으로 보낸 게 시작이었다. 공식적으로 17만명(서귀포시 인구), 비공식적으로 25만명(거제시 규모)으로 추산한다. 선진국은 아이를 귀하게 여긴다며 ‘최선의 차선’이라 믿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떠나보낸 아기들이 중년이 되어 한국에 돌아와 묻는다. “한국인으로 살 권리가 내겐 있는가, 없는가?”
◇인생을 끝내러 한국에 온다
경남 김해에 살다 길을 잃은 다섯 살 소년은 노르웨이로 입양됐다. “한국에 내 부모가 있다”고 말했지만, 양부모는 서류 속에는 ‘고아’라 표기된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알코올중독인 얀(Jan)은 한국에 돌아와 극빈민의 삶을 살았다. 신장결석 수술을 받지 못해 앓다가 7개월 후인 2018년 12월, 고시원에서 사망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으면 보건복지부 앞에 묻어달라. 그렇게라도 입양인 처지를 알리고 싶다.” ‘반송된 수출품’이 느낀 절망이었다. 주위에서는 “얀은 천천히 자살해 갔다”고 말한다.
◇“입양인의 귀향, 당황스러운가”
시모나 은미(Simone·40)씨는 부모 이혼 후 네덜란드로 입양됐다. “가난한 나라에서 입양해 왔다”는 말을 들을 때면 한국 부모가 굶어 죽는 상상을 했다. 한국이 그리워 10여 년 전 입국한 그녀는 시민 단체 ‘KOROOT(뿌리의 집)’에서 팀장으로 활동하다 3년 전 직접 ‘작은 행복(Klein Geluk)’이라는 단체를 세웠다. 가난한 입양인에게 지낼 곳과 음식을 지원하고 있다. 일 년 예산 3000만원 중 70%는 자신이 벌어서, 30%는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인은 몇 명인가.
“공식 통계가 없다고 한다. 300~700명 정도라 들었다. 우리는 재외 동포용 ‘F4 비자’를 받는데, 정부가 신청서에 ‘입양인’ 칸 하나만 만들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법무부는 현재 귀향 입양인 수를 파악하지 않고 있다고 밝혀왔다.)
-시민 단체를 직접 만든 이유는.
“직접 우리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1년간 입양인 2명이 자살하고 1명이 죽었다. 자살한 입양인을 20명도 더 알고 있다. 한국 정부에 입양인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하기 전, 서로 보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해외 입양을 가장 먼저 공식화한 나라다. 우리가 ‘최고령 입양인 공동체’다. 다른 나라 입양인들과도 함께 일하려 한다.”
-시급한 문제가 뭔가.
“한국은 입양아들이 돌아온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50년째 돌아오고 있다. 탈북인을 위해서는 여러 지원이 있지 않나? 귀환한 입양인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 즉, 가족 상봉을 위한 중앙 집중형 DNA 뱅크, 일자리 훈련 및 지원, 정착을 위한 규정 개정이 필요하다.”
-비자 문제는 어떤가.
“내국인은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간다. 입양인은 비자가 정지되고, ‘출국(deport)’당한다. 입양 부모가 절차에 소홀해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도 있다. 그들도 외국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 입양인을 위한 비자(예 F4-1)를 따로 발급하고, 현재 금지되는 단순 노동도 허용돼야 한다. 입양인 중에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F4 비자가 허용하는 사무직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
-왜 입양인에게 특별한 지위를 줘야 하나, 묻는다면?
“한국에서는 ‘아이를 위해’ 입양 보냈다고 한다. 정부나 입양 기관이 우리가 외국서 어찌 사는지 점검한 적 있나. 보내 버리고, 잊어버린 건 아닌가. 입양은 아이에게서 가족, 모국어, 국가를 빼앗는 시스템이다. 입양인이 원해서 입양된 게 아니다. 죽기 위해, 혹은 한국에 묻히고 싶어 입양인들이 귀향하고 있다. 한국에는 이런 우리를 위한 공간은 없는 것 같다.”
-지금도 한국이 입양인을 외면 하는가.
“입양인 고국 방문 프로그램에 나도 참가했었다. 좋은 호텔에 재워주고 선물도 많이 준다. 15번 참여한 입양인도 있다. 그런데도 귀향한 입양인은 아파 죽거나, 굶어 죽는다. 한국은 ‘한 번’은 환영해 주지만, 돌아와 사는 건 환영하지 않는 나라인가.”
-왜 돌아오는가.
“나는 한국말을 못 하지만 한국 사람이고 싶다. 자연스러운 귀소본능 아닌가.”
◇‘입양인 특별 법적 지위’가 필요한 이유
시모나씨처럼 네덜란드로 입양된 이창우(가명·47)씨는 입양 가정에서 불행하게 살다 15세에 집을 나왔다. 거기서 살기 싫어 한국에 온 지 7년째다. 현재 인천의 노후한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다. 직업이 없어 월세 35만원과 식자재를 시모나씨가 지원해 주고 있다.
-현재 비자 상태는.
“한 번 연장한 F4 비자 만료일이 7~8개월 남았다.”
-직업이 있나.
“나는 학력도, 영어도 부족해 영어 강사 같은 일은 못 한다. 갖고 온 돈은 비자를 갱신하면서 밀린 의료보험료 등을 내는 데 다 썼다. 이태원 식당에서 서빙했지만 식당 이전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에 들어와 ‘2개월 한국어 학습 지원’을 받았지만, 말을 배우지 못했다. 공사장에서 일할 때, 한국말을 못한다고 중국인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그가 한국에서 한 모든 일은 비자 규정상 불법이다.)
-네덜란드에서 직업이 소믈리에였다. 왜 한국에서 이렇게 사나. 국민이 아니라 지원금도 못 받는데.
“내 입양 서류에는 ‘쓰레기통에서 발견, 생후 2개월’이라고 적혀있다. 입국해 부모를 만났다. 가난한 어머니가 출산 직후 병원에 입양을 요청했다가 다음 날 취소했지만 ‘이미 기관으로 보냈다’며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자세히는 말 안 하겠다. 네덜란드가 ‘입양아 학대’를 은폐했다고만 써달라. 거기서는 도저히 살기 싫었다. 콜롬비아는 입양인이 귀국하면 국적을 회복해 준다고 한다. 나는 정치에도, 지원금에도 관심 없다. 꿈은 그냥 여기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해외입양’은 두 번째 기회? 그 환상에 인구대책도, 아동인권도 묻혔다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입양을 시작한 한국은 80년대 가장 많은 수의 아이를 입양시켰다. “선진국에 가면 더 많은 기회가 보장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1985년 한 해에만 9000명을 해외입양 보냈다. 당시 합계출산율은 1.66명. 2022년 (출산율 0.78명) 142명, 0.72명을 찍은 작년에도 79명이 해외로 보내졌다.
“2011년 유니세프 사무총장이 ‘한국이 왜 아직도 해외입양을 보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입양은 기회를 주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입양인들 현실을 공부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명예교수는 한국과 미국의 홀트아동복지회 근무 경력이 있는 학자다. 그가 말한다. “해외입양을 보내는 나라는 아동 복지가 발전할 수 없다. 우리는 저출산 국면에서도 2000명씩 입양을 보냈다. 인구 정책, 아동복지 정책 개념이 미약했다.”
세계적으로 ‘한국 아기’가 인기를 끈 데는 이유가 있다. 입양 기관을 통한 외국인의 ‘비대면’ 입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아기들은 위생 및 건강 상태가 좋다는 평가까지 있었다. “80년대 3000달러(81년 입양 수수료)를 받고 아기를 수출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2012년 해외입양인이 입양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만들어졌지만, 정보를 보여주지 않는 기관이 적지 않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60~1990년대 367건의 해외입양에서 서류 조작, 유괴, 부모 동의 없는 입양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했다. 정부의 묵인이 확인된다면, 입양인에 의한 ‘집단 소송’도 점쳐지는 대목이다.
지난 2013년 ‘고려인 동포 합법적 체류 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 된 이후 이론상 ‘8분의 1 고려인’도 정부가 한국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귀향한 입양인은 그보다 열악한 법적 지위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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