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쓰여야 재능
“오래 참고 견뎌 값진 선수 되라” 꿈나무 지원하며 자신도 힘 얻어
54세 최경주가 최고령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시상식이 끝난 뒤, 제주 골프 대회 현장에 있다가 ‘그 섬’에 잠시 올라가 봤다. 섬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그린 주변 개울 가운데 검은 돌무더기. 그 중앙에 잔디를 심어놓은 자리가 가로세로 몇 발쯤 되는지 쟀다. 그날 연장전 세컨드샷은 개울로 향했으나 그 섬 위에 극적으로 안착했고, 물에 영영 빠질 뻔한 우승 기회를 건져 올렸다. 최경주는 그 섬에 올라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웨지샷을 홀에 붙였다.
이후로도 그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또 봤다. 볼 때마다 감탄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하늘이 무너질 때 어딘가에선 섬이 솟아난다. 둘째, 실력은 이럴 때를 대비해 닦아놓는 것이다. 기적처럼 찾아오는 마지막 기회를 움켜잡기 위해. 셋째, 아들뻘 후배들과 겨뤄 승리할 정도로 최경주가 평소 자기 관리에 매진할 수 있는 원동력은 뭘까. 이미 한국 골프에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그가 몇 년째 허리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무엇 때문에 술과 콜라, 커피, 튀김을 끊고 여전히 매일 500번 이상 샷 연습을 하나.
2년 전 최경주에게 비슷한 걸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최경주처럼 되고 싶어서 골프를 시작해 KLPGA 선수가 된 완도 고향 후배 이소미였다. 이소미는 “태어나서 처음 골프가 살짝 싫어졌던” 그때 최경주를 찾아가 물었다고 한다. “하루 잘 쳐도 다음 날 못 치면 스트레스 받고, 한 대회 우승해도 다음 주 컷 탈락하면 또 스트레스 받는데, 이걸 몇 십 년 동안 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냐”고.
“동기부여 받을 수 있는 뭔가를 만들라고 하셨어요. 최 프로님은 기부와 신앙을 통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채우셨다고요.” 이후 이소미는 슬럼프를 털고 미국 무대에 진출했다. 이번 우승을 하고 나서도 최경주는 말했다. “꿈나무들에게 늘 강조한다. ‘반짝하고 사라지지 말고 롱런하는 선수가 되라. 오랜 시간을 통해 성장하는 값진 선수가 되라. 오래 참고 견디면 좌절도 딛고 일어서서 인생에 좋은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실컷 얘기해 놓고 싹 은퇴해 버리면 뭐가 되겠나.”
그는 매년 동계 훈련을 최경주재단 ‘꿈나무’ 청소년들과 함께 해왔다. 미국 자택을 캠프 삼았고,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사용하는 모래를 벙커 훈련에 썼다. 큰 꿈을 키워주려 했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평소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올라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운다. 덕분에 나이도 잘 안 먹는 것 같다.” 주니어 대회를 개최하고, 장학생을 지원했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까지 소년 최경주의 꿈과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해준 손길이 있었듯, 환경이 어려워도 청소년들이 넓은 세상에 도전하도록 용기와 신념을 전하는 것이 2008년 재단을 세운 목적이라고 한다.
꿈나무들은 그의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색과 딱딱한 손바닥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 많이 배울 것이다. 최경주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왔다. 심리학에선 사람이 일에 대해 갖는 태도를 직업, 경력, 소명으로 구분한다. 일을 물질적 수단으로만 여기거나, 지위·명성 등을 쌓는 발판이자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명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 일이 타인과 세상에 기여한다는 믿음을 품고 오래 헌신한다. 최경주는 “골프를 통해 아직도 이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했다. 주어진 재능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계속 전진하는 힘이 됐다. 최소한의 의무만 다한다는 ‘조용한 퇴사’의 시대에, 일과 재능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이가 무엇을 이루는지 그 섬에 올라가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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