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묘령’의 할아버지, ‘재원’인 남성이라고?

유석재 기자 2024. 6. 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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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의 ‘당선 소감’에 한자가 빽빽해서 도무지 못 알아보겠다는 얘기가 뉴스로까지 나왔습니다. 10년 전 본지에 1년 동안 ‘한자 문맹 벗어나자’ 기획기사를 썼던 저로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만, 기사에서 인용된 전광진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말을 인용하는 데서 그치겠습니다.

“한자가 우리 생활에서 완전히 멀어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한자는 우리말의 70% 이상, 학술어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교과서에 한자 병기를 늘리는 등 교육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문제는, 의미가 전혀 다른 말을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것에서 한자 전용의 폐해(’폐혜’가 아닙니다)가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물론, 언론사의 기사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심지어 성(性·sex)이나 행위의 주체가 뒤바뀌는 것도 모른 채 용어를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터넷에서 ‘묘령의 남성’이란 표현이 있는 뉴스 기사를 검색하면 수백 건이 뜹니다. “걸그룹 멤버가 묘령의 남성과 키스하고 있다”는 식입니다. 심지어 ‘묘령의 노인’이란 표현도 있습니다. 하지만 ‘묘령(妙齡)’이란 ‘나이를 알 수 없는’이 아니라 ‘스무 살 안팎의 여자 나이’를 뜻합니다.

남성의 이력을 설명하며 “요직을 두루 거친 뛰어난 재원”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재원(才媛)’이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란 뜻이니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남성은 ‘재자(才子)’라고 하는데 중국 고전 ‘당재자전(唐才子傳)’의 ‘재자’가 바로 이 뜻으로 쓰인 용례입니다만 현재 잘 쓰는 말은 아닙니다. “타인을 구조한 의인이 용감한 시민상 수여”라는 기사 제목은 ‘수여(授與)’라는 말이 ‘(증서·상장·훈장 등을) 준다’는 뜻이므로 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상(受賞)’이나 ‘받아’로 바꿔야 합니다.

“A배우 영화제 심사위원 위촉”이란 기사 제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촉(委囑)’은 ‘어떤 일을 남에게 부탁해 맡게 함’이란 뜻이기 때문에 이 문장에선 ‘맡아’나 ‘위촉돼’로 써야 맞습니다. “흡연을 금지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문장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금지(禁止)’란 ‘(법·규칙·명령 등으로)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함’이란 뜻입니다. 즉 ‘내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금지합니다’나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로 바꿔야 합니다. 물론 ‘흡연을 삼가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제발 담배를 피워 달라고 공손하게 말하는 격이 되는 경우도 숱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초대 학생회장을 역임했다”는 투의 문장도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역임(歷任)’이란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냄’이란 뜻이기 때문에 한 직위만을 언급한 이 문장에서는 맞지 않는 표현이며, ‘지냈다’로 쓰거나 ‘초대 학생회장 등을 역임했다’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한 영화에 대해 “박스오피스 2위에 등극했다”는 뉴스의 표현 역시 ‘등극(登極)’의 뜻이 ‘임금의 자리에 오름’ ‘어떤 분야에서 가장 높은 자리나 지위의 오름’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군수도병원에서 의가사제대 대상자로 판정돼 자택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뉴스 문장은 한자 뜻을 알면 금세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의가사제대(依家事除隊)’란 ‘현역 군인이 자기가 직접 집안을 보살펴야 하는 가정 사정(가사·家事) 때문에(의·依)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 예정보다 일찍 제대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이런 판정을 했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될까요? 이 경우는 ‘의병제대(依病除隊)’라고 써야 맞습니다.

흔히 ‘지향(志向·어떤 목표로 뜻이 쏠려 향함)’이나 ‘지향(指向·작정하거나 지정한 방향으로 나아감)’과 혼동하기 쉬운 ‘지양(止揚)’이란 단어도 잘못 쓰는 용례가 많이 드러납니다.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 무엇을 극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자본주의는 사리사욕을 지양해야 이뤄질 수 있다”란 문장은 맞지만, “남북의 이질화를 지양하자”는 문장에선 ‘지양’이 단순히 ‘하지 않음’의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해소(解消)’가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한 방송 뉴스에서 이런 말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CCTV에 찍힌 사람과 인상착의는 물론 옷차림까지 똑같았다고 합니다.” 인상착의(人相着衣)의 ‘착의’가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문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끝이 없을 것이지만, 적어도 ‘불편부당(不偏不黨·아주 공평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음)’이란 말을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뜻으로 쓴 관공서 안내문만큼은 좀 고쳐졌으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불편’하고 ‘부당’한 일인 것 같으니까요. 종종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화룡정점’으로, ‘일사불란(一絲不亂)’을 ‘일사분란’으로 쓰는 방송사 자막 역시 이제는 좀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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