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가야 할 길, 가지 말아야 할 길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연두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그해 가을, 훗날 로키마운틴연구소를 창립하는 미국의 에너지 물리학자 에이머리 러빈스는 미국외교협회가 발행하는 잡지 ‘포린 어페어스’에 32쪽짜리 논문을 발표했다. ‘Energy Strategy: The Road Not Taken?(에너지 전략: 가지 않은 길?)’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이 제목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프로스트의 이 시는 오역과 견강부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시의 내용은 프로스트가 산책 중 두 갈래의 길을 만나자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이 적은 길을 택했고 나중에 그 선택을 회고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더 어려운 길을 택한 결심을 칭송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로스트 자신은 그렇게 심각한 의미가 아니라고 밝혔다.
어쨌든 러빈스가 논문에서 활용하는 비유는 에너지 정책에도 두 개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당시의 선진국 정부와 기업들이 선호했던 것과 같이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의 중앙집중식 공급에 치중하는 ‘경성’ 경로이며, 다른 하나는 에너지 효율화와 재생에너지의 유연하고 지역분산적인 수급과 민주적 논의를 중심으로 하는 ‘연성’ 경로다. 러빈스는 프로스트와 달리 하나의 길이 좋은 선택일 뿐 아니라, 우리는 두 길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화석연료와 핵발전을 유지 또는 확대하면서 재생에너지도 늘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연성 에너지 경로가 전 세계의 정치적 스트레스를 경감시키며 기술적으로 재생에너지의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생각이 너무 이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했지만, 현실은 그의 길에 많은 연구자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들도 함께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또는 내년을 전후로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석탄화력 발전량을 초과해 최대 발전원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고, 원전은 몇몇 정부와 산업계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전소 숫자와 발전량 모두 답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뿐 아니라 특히 중국과 중남미 국가들의 재생에너지 증가세는 놀라울 정도다.
러빈스의 50년 전 생각이 시나브로 실현되고 있지만 그가 희망했던 연성 경로가 잘 조율되어 추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여전히 화석 및 핵 에너지 체제의 관성이 크고, 다가온 기후위기 앞에서 더욱 많은 도전을 헤쳐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성 경로가 더욱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동해에 대량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또 떠들썩하다. 개발의 경제성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2035년에도 계속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하는 화석연료를 캐서 태울 수 있다는 윤석열 정부의 ‘경성’ 사고와 욕망이 뚫고 갈 수 있는 길은 닫히고 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 굳이 3기의 신규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을 추가하려는 정부의 집착 역시 사라져가는 길을 개척하려는 패기로 봐주기엔 무모하기만 하다. 훗날 지금의 선택을 가벼운 한숨과 함께 후회하며 돌아볼 여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우 탈성장과 대안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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