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성폭행’ 재조명…솜방망이 처벌이 부른 위험한 사적 제재

오세진 기자 2024. 6. 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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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튜브 채널 운영자가 2004년 경남 밀양에서 발생한 여자 중학생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의 신상을 잇따라 공개하며 '사적 제재'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현행 형사사법체계를 비판하며 '사이다'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적 제재가 도리어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하고, 뜻하지 않은 제3의 피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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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성폭행 가해자 신상공개 파장
경남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 <한공주>의 한 장면. <한공주>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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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튜브 채널 운영자가 2004년 경남 밀양에서 발생한 여자 중학생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의 신상을 잇따라 공개하며 ‘사적 제재’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현행 형사사법체계를 비판하며 ‘사이다’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무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적 제재가 도리어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하고, 뜻하지 않은 제3의 피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메타(옛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유튜브 채널 ‘나락 보관소’ 운영자는 지난 1일부터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 가해자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 등 신상 정보가 담긴 내용을 잇따라 공개하고 있다. 6일까지 ‘밀양 사건 주동자’로 지목된 남성 3명과 ‘밀양 사건 옹호자’로 지목된 여성 1명 등 4명의 신상 정보가 공개됐다. 나락 보관소 운영자는 밀양 사건 가해자 44명의 신상을 모두 공개하겠다며, 누리꾼들의 ‘제보’를 독려하기도 했다.

신상 공개 이후, 20년 전 사건이 재조명되며 온라인은 사회적 공분으로 들끓었다. 영상이 각각 100만~300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첫번째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이 일하던 가게는 ‘별점 테러’ 등으로 문을 닫았다. 또다른 남성은 일하던 회사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3월30일 개설된 이 채널의 구독자 수는 그 사이 45만3천명으로 불어났다.

게티이미지뱅크

밀양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 공개에 대한 누리꾼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가해자가 죗값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현실에 분노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밀양 사건 피해자의 경우, 1년간 이어진 집단 성폭행으로 신체적·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44명의 가해자들은 피해자 가족 일부와 합의를 했다는 이유 등으로 기소되지 않거나 보호관찰 처분을 받는 데 그쳐 전과 기록조차 남지 않았다. 한 누리꾼은 이 채널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대한민국 법이 정의가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인민재판하는 세상이 되었을까”라며 “인민재판, 그게 저에겐 더 정의 같다”고 적기도 했다. 이런 반응은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 ‘비질란테’ 등 사적 제재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들이 인기를 끈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문제는 이런 사적 제재가 피해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락 보관소 쪽은 지난 5일 커뮤니티 공지를 통해 “피해자 가족 측과 메일로 대화(를) 나눴고, 44명 모두 공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라고 밝혔지만,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상담소는 이날 밤 보도자료를 내어 “피해자 측은 나락 보관소가 ‘밀양 집단 성폭력 사건’에 대해 첫 영상을 게시하기 전까지 해당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사전 동의를 질문받은 바도 없다”고 밝혔다. 오히려 “해당 영상이 올라온 후인 3일 영상 삭제 요청을 했다”고도 했다.

나락 보관소 쪽은 이런 요청을 수용하지 않을 태세다. 이 채널에는 6일에도 밀양 사건 관련 다섯번째(3번째 가해 남성) 영상이 올라왔고, 운영자는 ‘피해자 쪽의 중단 요청에도 영상 공개를 계속할 것이냐’는 누리꾼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가해자 신상공개가 피해자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 했다. 피해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기게 할 수 있고, 의도치 않은 2차 가해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가해자 신상 공개는 가해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신상 노출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이것은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라고 말했다. 한 예로 지난달 초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발생한 의대생의 옛 연인 살해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신상이 ‘디지털 교도소’라는 사이트에 공개되면서 피해자 신상 정보와 사진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무분별하게 확산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듯한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아울러 확인되지 않은 제보를 근거로 한 폭로는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기도 한다. 나락 보관소는 두번째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면서 “가해자의 여자친구가 운영하는 곳으로 추정”된다며 밀양의 한 네일샵을 언급했다. 하지만 이 네일샵 운영자는 두 번째 가해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이 여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마녀사냥으로 제 지인들이나 영업에 큰 피해가 되고 있다”며 “어제 (경찰서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법적 조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사적 제재 방식으로는 온전히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피해자의 상황과 의사를 확인해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고 가해자에게도 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가 마련된 상태에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며 “그것이 사적 제재이든, 수사기관과 법원이든 처벌하는 쪽에 과도한 권한이 부여되면 피해자의 주체적 참여나 결정권은 축소되고, 이는 더 나은 사회 변화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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