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달군 오페라 '리부셰'…낯선 언어의 아리아, 관객을 전율케 하다
'영광스러운 리부셰' 리뷰
체코 건국신화 서사시
리부셰 공주 역할 맡은
소프라노 크네치코바
맑으면서 우아한 음색
관객 눈·귀 사로잡아
흐루샤의 섬세한 조율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
음악의 파도 쏟아지는 듯
관객 15분간 기립박수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내 인생 최고의 음악이었어요. 공연 내내 소름이 끼쳐서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지난달 28일 저녁 체코 프라하 루돌피눔 드보르자크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을 이끄는 야쿠프 흐루샤의 지휘봉이 움직임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환호한 50대 신사가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분명 그만 느낀 감정이 아니었다. 나비넥타이와 턱시도로 멋을 낸 청년들부터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여성들까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1200여 명의 청중은 일제히 뜨거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시작된 기립박수는 무려 15분간 쉼 없이 쏟아졌다. 객석 곳곳에선 “브라보” “원더풀” 등 감탄사가 연신 들려왔다. 제79회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에서 열린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 기념 공연 ‘영광스러운 리부셰(콘서트 오페라)’ 얘기다.
이날 무대에선 체코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 속 공주 리부셰와 그의 남편 프르제미슬의 만남, 프라하의 탄생 서사를 담은 스메타나의 오페라 ‘리부셰’가 콘서트 오페라 형식으로 펼쳐졌다. 통상 콘서트 오페라라고 하면 주요 아리아만 선택해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에선 화려한 무대 장치나 안무 등만 생략됐을 뿐 ‘리부셰’ 전막(1~3막)의 모든 악곡이 빠짐없이 연주됐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을 비롯해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체코 음악가들이 총출동했다.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으로부터 ‘에디터스 초이스’ ‘2021년 최고의 클래식 음반’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데 이어 BBC 뮤직 매거진상을 받은 정상급 소프라노 카테리나 크네치코바가 여주인공 리부셰 역을 맡았고, 빈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 극장),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런던 로열 오페라 극장 등 세계적인 오페라 명가(名家)에서 주역을 맡아온 베이스 바리톤 아담 플라체트카가 남주인공 프르제미슬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지휘자 흐루샤는 첫 소절부터 각 악기군의 소리를 섬세하게 조율하면서 작품 특유의 신비로운 음향을 만들어냈다. 그는 엄격한 지시와 통제로 악단의 소리를 얽매기보단 단원 한 명 한 명이 충분히 노래할 수 있도록 음악적 공간을 만드는 지휘를 선보였다. 그 영향으로 체코 필하모닉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두터운 보헤미안 톤이 제대로 살아났다.
악단은 연주 내내 유연하게 반응했다. 제한된 음량과 정제된 음색으로 단단한 음향적 배경을 이루는 현과 그 위로 포개지는 목관의 청아하면서도 선명한 선율, 웅장한 금관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강한 응집력은 청중을 장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광활한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한순간도 거칠다고 느껴지지 않는 소리에서 지휘자와 악단의 대단한 집중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프라노 크네치코바는 리부셰로서 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소리를 들려줬다. 맑으면서도 우아한 음색, 소리의 중심이 잘 잡힌 발성, 적당히 무게감 있는 울림, 선명하면서도 정확한 고음 처리 등 빈틈없는 기교를 선보이며 초반부터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객석을 향해 소리를 직선으로 뻗어 내면서도 모든 음의 끝을 둥글게 처리해내는 고급스러운 선율 표현은 전설 속 공주의 품위를 드러내는 데 손색이 없었다. 명료하게 울리는 단단한 소리는 피아노·피아니시모 부분에서조차 힘을 발휘했고, 호소력 강한 음색으로 작품 특유의 애국적 대사를 풀어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마치 스메타나가 원하는 리부셰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 듯했다.
프르제미슬 역의 플라체트카도 등장부터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소리 자체가 특별하기보다는 섬세한 강약 조절, 선율과 선율 사이에 충분한 호흡을 만들어내는 여유, 거대한 대지를 뒤흔드는 듯한 광활한 울림에서 그가 얼마나 음악적 표현 폭이 넓은 성악가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명쾌해지는 음색과 폭발적인 성량을 뿜어내는 그의 호탕한 가창은 극 중 심리 상태의 변화가 크지 않은 인물임에도 음향 자체를 입체적으로 표현해내며 색다른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공연의 숨은 주역은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이었다. ‘리부셰’는 합창이 특히 어렵고 비중이 큰 작품인 만큼 이들의 역량에 따라 전체 음악적 완성도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중요한데, 이날 합창단은 완벽에 가까운 음향을 들려줬다. 정제된 음색과 제한된 음량으로 기꺼이 후경을 맡다가도 어느 순간 소리를 키우면서 머리 위로 음악적 파도가 쏟아지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솔리스트의 소리가 청중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나간다면 합창단은 모든 선율을 감싸안는 듯한 밀도 있는 소리로 생동감을 부여했다. 내내 윤기 있는 음색으로 둥글게 퍼져나가는 합창단의 가창은 작품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를 살렸고, 반복해서 극적인 악상에 도달하면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에너지는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이들이 4시간(인터미션 포함)에 걸쳐 보여준 스메타나의 장대한 서사시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었다. 슬라브적인 색채와 민속음악 리듬, 특유의 체코 사운드가 온몸을 휘감는 명연. 이는 기술적인 완성을 뛰어넘어 연주자와 성악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정, 분명한 해석을 갖췄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왜 그 나라의 음악은 그 나라의 소리로 만나봐야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을 프라하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프라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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