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서 쓰러진 네팔 이주 노동자에 동료들 ‘십시일반’

윤연정 기자 2024. 6. 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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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비오는 날엔 우비를 입고, 맑은 날엔 붉은 조끼를 입고 늘 거리에서 마이크를 쥐고 외친 사람, 지난해 초까지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사무국장을 맡았던 네팔 출신 노동자 머두수던 오쟈(42)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한국의 동료들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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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두수던 오쟈 전 이주노조 사무국장
작년 귀국하고 중환자실 입원 소식에
이주노동자 등 1200명 3600만원 모아
신장 80% 손상되고 간 기능 떨어져
“이주민 차별 없애는 제도 개혁을”
지난해 2월 네팔로 돌아가기 전 머두수던 오쟈(오른쪽) 전 사무국장에게 우다야 라이(왼쪽) 이주노조 위원장이 감사패를 전달하는 모습.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제공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비오는 날엔 우비를 입고, 맑은 날엔 붉은 조끼를 입고 늘 거리에서 마이크를 쥐고 외친 사람, 지난해 초까지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사무국장을 맡았던 네팔 출신 노동자 머두수던 오쟈(42)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한국의 동료들에게 전해졌다. 경찰 단속에 붙잡혀 지난해 2월 네팔로 돌아간 지 1년 조금 넘었다. 신장의 80%가 손상된 데다, 간 기능 또한 크게 저하돼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라고 했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그의 견고한 목소리를 응원했던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동료들의 마음도 무너졌다. 우다야 라이(57) 이주노조 위원장은 6일 “고향에서 치료비가 부족해 가족들이 도움을 청해와 상황을 알게 됐다”며 “국내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들이 2만∼3만원씩 마음을 모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2일까지 2주 동안 1218명이 모은 성금은 3600만원이었다. 몸 상태가 악화할 땐 목소리 내기조차 쉽지 않은 상태라는 오쟈는 그나마 상태가 나아진 틈을 타 라이 위원장을 통해 한겨레에 말했다. “한국에 있는 동지들이 마음을 써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돼요.”

오쟈는 2014년 한국에 고용허가제로 들어와 인천의 와이어 커팅 공장에서 60~70kg정도 되는 와이어 나르는 일을 했다. 당시 공장 사장과 동료들로부터 부당한 폭언과 폭행 등을 겪었다. 병원에서 일을 멈춰야 하다고 할 정도의 허리 통증이 생겼다. “회사에 가서 얘기했죠. 몸이 아프다고요. 회사를 옮겨 달라고요. 그러자 회사에선 ‘일해! 일 안 할 거면 네팔 가!’라고 했어요.”(2018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와의 인터뷰)

2022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청사 앞에서 진행된 이주노조 집회 행진 맨 앞줄에 오쟈 전 사무국장이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모습.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제공

그는 우다야 라이 위원장의 도움으로 14개월 만에 사업장을 옮길 수 있었다. 이주노조와 인연을 시작한 계기다. 사업장 이동 제한에 발 묶여 숨죽인 채 부당한 환경을 견뎌야 했던 건, 그 자신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현재 한국 사회 이주노동 제도에 속한 동료 모두의 문제였다. ‘차별없는 대우’와 ‘고용허가제 폐지’를 거리에서 외치기 시작한 까닭이다.

오쟈는 지난해 초까지 서울, 안성, 천안 등 다양한 공장의 노동자로, 이주노조를 지탱하는 노동 활동가로 한국에서 살았다. 비전문취업(E-9) 비자 기한은 어느덧 만료돼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됐다. 경찰 단속에 붙잡혀 지난해 네팔로 돌아가야 했다. 라이 위원장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렇게 아픈 줄 몰랐다. 여기 있으면서 제대로 건강검진도 받지 못해서 어디가 아픈지 알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쟈는 “한국으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단다. 오쟈는 “한국에 적응하는 것과 일을 하는게 힘들었지만 한국에서 동지들을 만나고 세상을 알게 된 게 기억에 제일 남는다. 지난 10년 동안 큰 변화는 없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는 거 같다. 앞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차별받지 않기 위한 더 많은 제도적인 변화가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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