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땅굴 속에서 마시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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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10월28일 세종은 교지를 내려 과도한 음주로 삶을 망친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백성들에게 술을 절제할 것을 당부한다.
풍악을 잡히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이 그의 본업이었다.
만약 한 국가, 한 사회에서 권력과 책임이 가장 큰 사람이라면 음주의 양은 0에 가까워야 한다.
만약 술을 무한히 마시며 그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면, 그 권력과 책임을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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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10월28일 세종은 교지를 내려 과도한 음주로 삶을 망친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백성들에게 술을 절제할 것을 당부한다. 이 교지는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되었다.
세종이 가장 먼저 꼽은 사람은 은(殷)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다. 주왕은 술과 음악을 좋아했다. 풍악을 잡히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이 그의 본업이었다. 당연히 여자도! 달기는 그가 총애해 마지않는 여자였다. 주왕과 달기는 쾌락에 몰입했다. 환락(歡樂)하는 거창한 건물을 따로 짓고 그곳에 온갖 사치품, 애완동물을 끌어모았다. 압권은 술을 가득 채운 연못과 고기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들이었다.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남자, 여자 옷을 벗겨 그 속에서 뛰어놀게 하였다. 세금은 산처럼 무거워졌고 백성들은 실낱같은 목숨도 잇기 어려웠다. 당연히 항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폭군은 그들은 포락형에 처했다. 하지만 저항은 거세졌고 주왕은 결국 불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의 말은 이어진다. 춘추시대 정(鄭)의 대부(大夫) 백유(伯有) 역시 오직 술이었다. 남이 타박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그는 집에 땅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밤새 퍼마셨다. 가신(家臣)들이 찾아와도 만날 수가 없었다.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자석(子晳)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백유는 술이 깬 뒤에야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백유는 양(羊)을 파는 시장에서 죽는다.
백유가 땅굴 속에서 혼자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면,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기를 좋아했다. 손님이 오면 가지 못하게 수레 차축을 고정시키는 비녀장을 뽑아 우물에 던져 버렸다. 요즘으로 치면 같이 퍼마시려고 자동차 바퀴의 바람을 빼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퍼마시던 진준은 뒷날 흉노(凶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살해되었다. 그가 잔뜩 취해 있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 더 들어본다. 후위(後魏)의 장수 하후쾌도 주당이었다. 그는 재산을 술 마시는 데 탕진했다. 동생과 누이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지만 마시기 바쁜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상중(喪中)에도 음주를 그치지 않았던 그는 결국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죽었다.
네 사람은 모두 음주로 목숨을 잃었다. 술이 좋아 한껏 퍼마시다 제 목숨 저가 포기하겠다는데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렇게 퍼마신 술로 인해 주왕은 나라를 잃었고 백유는 가문을 파멸로 이끌었다. 진준은 막중한 국사(國事)를 망쳤고 하후쾌는 혈육의 윤리를 잊었다. 이 파멸의 과정에서 허물없는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시정잡배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위의 네 사람은 권력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날마다 빠져들었던 음주의 쾌락은 타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권력과 책임이 크면 클수록 음주의 양은 반비례해야 마땅하다. 만약 한 국가, 한 사회에서 권력과 책임이 가장 큰 사람이라면 음주의 양은 0에 가까워야 한다. 만약 술을 무한히 마시며 그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면, 그 권력과 책임을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땅굴 속에서 마시든지 말든지, 그러다 죽든지 말든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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