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정치 폐해, 정치 지도자가 바로잡아야

한겨레 2024. 6. 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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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07 _‘양날의 검’ 팬덤

팬덤당원들이 보여주는 열광과 적대의 감정은 거대한 규모의 당원들을 결속시키는 유용한 방식이긴 하나 결정적 단점이 있다. 이견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대안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정치의 공간이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사회경제적 어젠더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2023년 9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에서 이 대표 지지자들이 국회로 향하자 경찰이 막고 있다. 한 지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정효 기자

“소프트웨어가 세계를 잡아먹고 있다(Software is eating the world).” 넷스케이프의 공동 창업자 마크 앤드리센이 2011년에 한 말이다. 그가 실리콘밸리의 테크기업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말하면서 ‘eat’(먹다)란 단어를 쓴 게 흥미롭다. 생각해 보면 참 적절한 선택인 듯하다. 빗대자면, 팬덤정치가 정치를 ‘잡아먹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만들어낸 변화를 오마라(O’Mara)는 혁명이라고 불렀는데, 팬덤정치도 혁명일까?

팬덤정치를 가장 극점으로까지 끌어올린 인물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그는 흔히 ‘변방의 사또’ 출신이다. 사또가 되기 이전에는 그냥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무명의 변호사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성남시장이 되고, 경기도지사가 되고, 대선 후보가 되고, 당대표가 되었다. 그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강력한 성공무기는 팬덤정치였다. 그가 펼치는 새로운 시도에 대해 기성 언론이 매도하자 자위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소셜 미디어였다. “에스엔에스(SNS)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정치를 시작한 이재명은 행운아다. 그는 에스엔에스 시대에 최적화된 정치지도자”(장동훈)란 찬사를 듣는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 것을 넘어 팬덤을 만들어내고, 그 팬덤으로 숱한 위기를 이겨내고 정치의 슈퍼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발견했고, 소셜 미디어는 그를 성장시켰다.

박근혜 팬덤과 문재인 팬덤을 거쳐 팬덤정치는 이재명 팬덤에서 만개했다. 정치의 새로운 문법이 됐고, 우리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팬덤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팬덤과 명팬덤의 차이에 대해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문재인은 팬덤의 창업자는 아니다. 그는 팬덤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 급급했을 뿐 팬덤의 구성과 운영에 개입하지 않았다. 반면 이재명은 팬덤의 창업자다. 팬덤의 구성과 운영에 직접 개입한 ‘팬덤의 시이오(CEO)’다.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유형이다.”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SNS 대통령’이란 호칭을 얻었고, ‘포노 사피엔스’라고 불리었다.

이재명 팬덤은 성남시장 시절의 무상산후조리원, 무상교복 등 파격적 정책과 분투하는 개혁가 스탠스, 누구보다 먼저 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등 사이다 발언,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선명한 적대감 표출, 경쟁자와 반대편의 폄훼와 핍박에 따른 언더도그마 효과, 선거에서 아깝게 진 간발효과(nearness effect) 등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역시 가장 핵심적인 동력은 본인의 에스엔에스 관리였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만 명과 대화를 나눈다. 대화 창구도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카카오톡, 밴드,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유튜브, 인스타그램, 인터넷 카페, 게시판, 블록, 댓글 등 수많은 채널을 통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구를 맺고 정보를 공유한다.” 이재명 대표 본인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 혁명을 외쳤고, “단언컨대 이제 대한민국의 진정한 변화는 손가락 끝에서 나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대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손가락, 그 손가락의 주인들이 형성한 팬덤에 의해 대한민국의 정치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3년 8월17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검찰 소환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명팬덤의 감성적 결속은 문재인 팬덤을 넘어선다. 문팬덤의 감성화를 상징하는 단어가 ‘이니’라면 명팬덤의 그것은 ‘아빠’다. 잼칠라(이재명+친칠라), 울잼(우리 이재명), 잼파파, 밍밍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가장 본질적 호칭은 아빠다. 그 아빠를 좋아하는 이들이 ‘개혁의 딸’이다. “아빠 사랑하잔아”라고 하면 “고맙자나”라고 답하는 자나체까지, 그야말로 역대급 애착이다. 배타성에서도 명팬덤은 문팬덤을 훨씬 능가한다. 딴소리하는 정치인들을 수박으로 멸칭하면서 그들 대부분을 공천에서 힘으로 탈락시켰다. 당의 결정도 뒤집고, 당헌 당규의 개정도 수시로 이뤄낸다. 최근 국회의장 경선을 둘러싸고 탈당까지 불사하는 실력행사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를 더 세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쯤 되면 호불호나 긍부정을 떠나 팬덤의 패권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놀라운 기세로 정당 등 제도적 영역까지 거침없이 ‘잡아먹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이다. 정당들이 번갈아 가면서 집권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얘기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우리 정당들은 강해지기보다 약해졌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적 대치가 일상화됐고, 그러다 보니 정치가 운신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들은 지구당을 없애는 등 당의 사회적 기반을 좁히는 대신 공천 민주화, 즉 정당의 공천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에서 해법을 찾았다. 온라인 당원제도 도입했다. 그 결과 당원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당원수가 2004년 약 200만 명에서 2021년 1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인구수 대비로 보면 4%에서 20%로 폭증한 셈이다.

이렇듯 당원수는 늘어났지만 정당은 되레 허약해졌다. 정당의 이름과 지도부는 집권여부에 상관없이 수시로 바뀌었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일상적으로 꾸려지곤 했다. “원래 정당들이 해야 할 그들 자신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집단들의 요구와 의사, 이익과 가치를 대표하거나 매개하는 역할은 거의 소멸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다. 정당 안과 밖에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의견과 가치를 공유하는, 잘 조직화된 운동집단들이나, 언론 매체들이 특정의 방향으로 여론을 창출하거나 조직화한다. 이들 집단들이 정당의 방향과 가치를 실제로 선도하는 현상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최장집) 그 결과 정치의 개인화, 즉 정치의 주역이 정당에서 개인으로 넘어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팬덤정당이 등장하게 된 책임을 오롯이 정치팬덤의 과잉행동이나 팬덤을 동원하는 특정 정치인의 야심에게만 지우긴 어렵다. 팬덤이 당원의 이름으로 텅 빈 정당을 접수하고, 그들의 의지와 열정에 의해 특정 정치인이 지도자로 부각되는 현상은 한 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개혁이 추동한 큰 흐름, 즉 참여의 확장 속에서 생겨났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팬덤정치에는 매우 위험한 구조적 동학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팬덤당원들이 보여주는 열광과 적대의 감정은 거대한 규모의 당원들을 결속시키는 유용한 방식이긴 하나 결정적 단점이 있다. 이견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대안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정치의 공간이 줄어들게 된다는 사실이다. 타협이나 다른 생각은 배신, ‘내부총질’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사회경제적 어젠더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명한 대치는 삶의 이슈보다는 정치적 이슈를 선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팬덤정치는 정치실패 또는 정치무능이 불러온 현상이다. 참여 의지를 가진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로 나서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시도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팬덤정치를 무조건 죄악시할 순 없다. 그렇게 해서는 그 폐해가 해소되기는커녕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정치팬덤을 시끄러운 소수, 광신의 무리로 자리매김하면 정치는 더 열화되고, 갈수록 흑화될 것이다. 이러다간 어쩌면 정치 때문에 나라 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팬덤정치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노력이다. 이는 오롯이 정치인의 몫이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비전과 소신을 갖고 팬덤을 이끌어가는 책임의 리더십보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들의 혐오를 부추기고 그 대가로 권한을 늘려주는 거래의 코트십(courtship)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고, 막아야 한다. 당이 게토화되고, 행태가 일베화되면 정치는 죽고 결국 나라도 망가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별로 없다. 지금부터 다음 대선까지가 마지막 기회인 듯싶다.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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