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도 없는 시대 [김명인 칼럼]

한겨레 2024. 6. 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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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그저 자기 발밑만 바라보고 살 뿐 이런 생각의 품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도 황폐하고 사람들의 내면도 황폐하기만 하다. 이념 과잉의 시대는 그래도 희망이 있던 시대지만 이념의 과소 혹은 부재를 더 걱정해야 하는 시대는 희망의 여지도 없는 시대가 아니겠는가.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내가 아직 현직 교수이던 시절, 한 오년쯤 전인지 십년쯤 전인지 기억이 흐리기는 한데, 학생들끼리 학사 정보를 공유하는 교내 게시판에 국어교육과 김아무개 교수 강의의 주 내용은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취지의 글이 올라와 있더라고 동료 교수가 귀띔을 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름지기 사범대는 예비 교사를 키우는 곳인데 김아무개 교수는 불공정하게도(!) 매우 좌편향적 현대사 인식을 가르치는 것 같다는 글도 게시된 적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허허 웃곤 했다. 또 한번은 어떤 학생이 한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나를 두고 페미니즘 편향의 강의를 한다고 볼멘소리를 했고 나는 그런 대응이 기특해 보여 그 학생과 조금 긴 온라인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이 어떠하든 강의할 때는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소개하기는 해도 이를 주입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매우 애썼다. 다만 근대문학론이나 소설론을 가르칠 때 사회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회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마르크시즘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국 현대문학사를 가르칠 때 한국현대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인데 그런 이야기를 처음 접한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인상 깊게(?) 들렸던 모양이고, 그런 학생 중 일부가 그런 내용을 강의 중에 거론하는 것 자체만으로 나를 좌파 교수 혹은 페미 교수라고 확증한 모양이다. 물론 그런 일부 학생들에 대해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다. 다만 왜 저 교수가 저런 강의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대신 다짜고짜 낙인을 찍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그 학생들이 좀 딱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나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벌써 긴장 모드가 작동되는 한국 사회의 지식-학문-사상 지형도 한심하고 이런 것들이 질문과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풍문과 매도의 대상이 되는 오늘날 대학의 변화된 풍토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마르크시즘)와 여성주의(페미니즘)에 친화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평판이 두려워 서둘러 변명하거나 방어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마르크시스트도 페미니스트도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못 된 사람이다. 청년 시절에 박정희나 전두환의 군사독재체제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싸울 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아래 절대다수의 빈곤과 불평등을 토대로 독버섯처럼 유지되던 한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너무 싫어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상상력에 깊이 경도되었고,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때로 급진적 혁명투쟁의 규율도 적극적으로 감수해야 했지만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이념의 영역 속에서 살기에는 세상도 나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여덟 시간 자고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여가를 즐기는 삶을 누리는 세상이 와야 하고, 그런 세상이 오려면 이 지옥 같은 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든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원론적 마르크시스트라고 할 수는 있겠다.

그리고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사실은 남근주의와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이 만연한 젠더적 계급사회였다는 것이며, 그 세상에서 여성들은 마치 노예들처럼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나는 페미니즘의 지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문제는 오랜 사회구조와 관습과 제도라는 보편적 역사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족이나 직장 등 매우 일상적 영역에서 존재하는 미시생활적 문제이고 그 안에서 지배자, 혹은 수혜자 남성인 나 자신의 입장과 태도, 언어를 늘 성찰해야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나는 지금도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가 못 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마르크시스트 여부의 문제는 그렇게 되거나 되지 못하거나 하는 신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 여부의 문제는 그렇게 살거나 살지 못하거나 하는 윤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에 우선해서 페미니스트이고 싶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솔직히 말해 어떤 ‘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특히 어떤 도그마(교의)를 정해 놓고 덮어놓고 믿어야 하고 이대로 따라야 한다는 식의 순혈주의적 이념 추종은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 그것은 또다른 노예의 삶이다. 마르크시즘도 페미니즘도 노동자와 여성이라는 소수자들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빚어진 이념이고 어떤 소수자라도 억압과 착취와 차별 속에서 사는 세상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 이념들을 지지하고 기꺼이 ‘고무 찬양’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종교화되어서 그런 이념들이 모든 생각과 삶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적 세상이 오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대체로 모든 이념들은 다른 이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는 들이대지 않는다. 나는 내가 공감하는 이념이라면 오히려 더 그 단점에 대해서, 아킬레스건에 대해서 냉혹한 성찰과 비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러니 ‘주의자’가 되기는 글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불가의 말은 내가 오래도록 좋아하는 경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어떤 이념이든 발붙이기 힘든 요즘에는 이런 걱정도 한가해 보인다.

한 사람이 어떤 이념을 가지거나 좋아하게 되는 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다. 그러자면 매우 많은 생각의 품이 들기 때문이다. 이념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지식 정보들과 고금의 인류의 정신적 축적물들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이것들을 공공선이라는 관점에서 체계화하고 내 삶의 지표로 만들어야 하는 매우 높은 지적 내공을 요하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저 자기 발밑만 바라보고 살 뿐 이런 생각의 품을 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도 황폐하고 사람들의 내면도 황폐하기만 하다. 이념 과잉의 시대는 그래도 희망이 있던 시대지만 이념의 과소 혹은 부재를 더 걱정해야 하는 시대는 희망의 여지도 없는 시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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