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교제살인의 공범인가 [아침햇발]

최혜정 기자 2024. 6. 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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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모녀를 살해하고 달아난 혐의(살인)를 받는 60대 남성 박아무개씨가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혜정ㅣ논설위원

그저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다. 며칠 전 60대 여성이 30대 딸과 함께 자신의 사무실에서 참변을 당한 이유도, 지난달 20대 여성이 건물 옥상에서 전 연인에게 살해당한 까닭도 모두 이별 통보 때문이었다. 지난 3월 경기 화성에서 20대 여성이 숨지고 그 어머니가 중상을 입은 사건도 같은 이유였다. 여성들은 죽지 않기 위해 인터넷에서 ‘안전 이별’을 검색한다. 여성이 가깝다고 믿었던 파트너 손에 죽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가해자들은 “잠자는데 불을 켜서”, “텔레비전 전원을 끄지 않아서”, “내 말을 듣지 않아서”, “휴대전화 잠금을 풀어주지 않아서”, “맞아야 말을 들어서”(한국여성의전화 ‘2023년 분노의 게이지’) 죽였다고 했다. 여성이 하릴없이 죽어가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은, 이런 죽음을 멈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정부와 국회의 태도다.

과거 혹은 현재의 연인·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교제 폭력은 일반적인 폭력과 다른 특수성이 있다. 교제 폭력이 가장 심각한 단계인 살인에 이르는 데는 반복된 폭력, 집요한 스토킹, 헤어지자는 요청 거부, 강압적 통제 등 수많은 전조 증상이 존재한다. 가해자는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상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할 때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꺼리는 경우가 많지만, 신고한다 해도 가해자에게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친밀한 사이’의 폭력을 규제하는 법은 가정폭력처벌법과 스토킹처벌법이다. 가정폭력처벌법의 대상은 배우자(사실혼 포함)와 친족 등 가족 구성원으로 한정돼 있고, 스토킹처벌법은 법에 정해진 스토킹 행위 여부를 따져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한다. 가정폭력에 속하지 않거나 스토킹 피해 입증이 어려운 교제 폭력은 즉시 분리 등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일상을 공유했던 가해자는 피해자의 집과 회사, 친구 관계, 자주 가는 곳 등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숨을 곳 없는 피해자는 폭력과 살해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현장에선 ‘사랑싸움’으로 치부되곤 한다. 지난 4월 경남 거제시에서 집에 무단침입한 전 연인의 폭행으로 숨진 여성은 수시로 스토킹, 통제, 폭행 등의 피해를 입었다. 경찰에 12차례 신고했지만, 1건을 빼고는 전부 현장 종결되거나 발생 보고만 됐다고 한다. 또한 신고하더라도 보복 우려에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제 폭력은 형법상 폭행·살인 등과 합산될 뿐 별도의 정부 공식 통계가 없어 전모를 알기 어렵다. 한국여성의전화는 해마다 ‘분노의 게이지’라는 이름으로 ‘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 살해 분석’ 보고서를 따로 발표한다. 2023년 한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138명이었다. 이는 언론에 보도된 최소한의 수치일 뿐, 기사화되지 않은 죽음을 포함하면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여성의 숫자는 더 많을 것이다. 이미 올해 사회적 공분을 자아낸 사건만 해도 적지 않다.

여성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역대 정부는 범정부 종합 대책을 마련해 문제 해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왔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기조 때문인지, 연일 교제 살인이 발생하는데도 지금껏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 수장은 몇달째 공백 상태이고, 내부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담당하는 권익증진국장도 공석 상태라고 한다. 올해 여가부의 여성 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은 삭감됐고, 교제 폭력을 사적인 일로 치부해 합의를 종용하는 공권력의 태도 역시 교정되지 않고 있다. 입법 사각지대를 막기 위한 법안은 국회 논의 테이블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임기 만료로 모두 폐기됐다. 해마다 수백명의 여성이 죽거나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지만, 종합적 원인과 실태 파악, 법·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와 개선 방안은 논의되지 않는다. 그저 여성은 저출생 대책을 위한 ‘출산 도구’로 호명되는 게 전부다. 여가부 폐지 추진으로 상징되는 성평등 정책에 대한 집요한 무력화, 여성 폭력에 대한 무관심과 정책 부재, 공권력의 소극적 대처와 국회의 직무유기 등이 겹쳐진 결과다. 결국 정부와 국회의 외면 속에 여성들이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국가가 교제 살인의 공범 아닌가.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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