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에서 가족을 돌보는가?
“왜 가족이 고령자를 돌보는가? 가족 돌봄은 당연한 것인가?”
당연하지 않다는 얘기다. <돌봄의 사회학>(오월의봄 펴냄,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고령화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대표 페미니스트이자 나이 듦에 대해 독보적인 통찰을 보여온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가 쓴 방대한 돌봄 연구서다. 저자는 2000년 시행된 일본의 개호보험 시행 10년을 맞아 2011년 이 책을 펴냈다. 개호보험은 한국 노인장기요양보험의 모델이 된 사회보험이다.
저자는 돌봄·돌봄노동의 정의, 관련 복지·노동 이론을 꼼꼼히 따져 살피고 들어간다. 약 10년에 이르는 현지조사와 추적조사, 총 200건 이상의 면접조사를 통해 현장을 분석하고 돌봄의 미래까지 진단한다. 일본 시민사업체의 선도적 돌봄 사례 등 한국도 참고할 점이 적지 않다.
먼저, 돌봄을 ‘사랑의 행위’가 아닌 ‘돌봄노동’으로 못박는다. 나아가 인권과 돌봄 권리를 연결하는 기존의 이론보다 더 급진적으로 온정주의와 시혜주의에 대항하는 ‘당사자 주권’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거기에 더해 돌봄 연구가 젠더 편향적으로 이뤄져왔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가족 돌봄은 강제노동”이라며 저자는 공론장 한복판에 돌직구를 내리꽂는다. 국가를 ‘큰 집’이라 보는 시각 자체가 ‘작은 집’, 곧 사적 영역의 돌봄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고 본다. 돌봄은 젠더, 계급, 인종, 민족이 변수로 작용한다. 돌봄노동은 성별화된 노동, 비정규직화·주변화된 노동이고, 갈수록 여성의 참여가 늘어나는 악순환에 놓여 있다.
돌봄 이슈는 가족(私), 시장(民), 국가(官)의 실패를 모두 상징한다. 저자는 시민사회, ‘협’(協) 부분에도 위태로움과 희망이 공존한다고 지적한다. 서로 보완하여 적절한 서비스 배합에 성공하자는 말이라기보다 사적 돌봄에 대한 인식 전환과 더불어 ‘니즈’를 가진 당사자의 적극적인 주권 행사 없이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에 가깝다.
저자가 온힘을 다해 사적 돌봄의 신화를 해체하고 돌봄노동의 젠더적 비대칭성을 폭로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돌봄의 미래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함이다. 돌봄 제공자와 돌봄이 필요한 자가 서로 다른 생각과 바람을 갖고 있지만 모두 각자 원하는 삶을 추구할 기회를 얻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돌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핵심을 놓치지 않는 점에서 우에노 지즈코의 탁월함이 더욱 빛난다. 4만8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래디컬 데모크라시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승렬·하승우 옮김, 한티재 펴냄, 2만8천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로 한국에서 잘 알려진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이 28년 만에 번역됐다. 지구촌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경제개발이나 과학기술 발전의 맹목적 추구가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행동, ‘근원적 민주주의’라는 주장을 편다. 김종철 <녹색평론> 전 발행인의 요청으로 번역을 검토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아리안 샤비시 지음, 이세진 옮김, 교양인 펴냄, 2만2천원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은 “좌파의 집단주의”(조던 피터슨)라는 말로 손쉽게 비난당하곤 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 반대하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운동은 정당한 걸까? ‘남자는 쓰레기다’라는 말은 일반화의 오류를 가지고 있는가? 첨예한 문화전쟁 한가운데 기만의 언어와 차별적 선동을 가려내고 대결하는 책.
에밀의 루소
김조을해 지음, 북인더갭 펴냄, 1만6천원
2004년 <파라21> 신인 공모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김조을해의 단편소설 7편을 묶었다. 표제작 ‘에밀의 루소’는 아이 낳지 않고 사는 여성 ‘수’에게 (아이) 생산 커리어를 제공하겠다며 나타난 방문객을 통해 생명 돌봄보다 인구 재생산에만 골몰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재를 떠올린다.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낙오자들의 반격이 유쾌하다.
쓰는 여자, 작희
고은규 지음, 교유서가 펴냄, 1만6800원
소설가 은섬은 동료들과 ‘작가 전문 퇴마사’를 찾는다. 키보드에 붙은 ‘악귀’는 1930년대 후반 서포를 운영하던 여자 작희와 그 어머니 중숙. <트렁커> <알바 패밀리> 등 남루한 현실을 따뜻하고 통렬한 유머로 버무리는 데 능한 고은규의 새 장편소설. 성별·계급·시대의 굴레 속에서 청탁 없이도 글 쓰던 여자들과, 100년 뒤에도 쓰는 행위에 기대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에서 해방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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