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람보다 위스키가 많은 ‘버번의 고향’... 美 켄터키 가보니

켄터키=유진우 기자 2024. 6. 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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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한 바에서 바텐더가 버번 위스키로 하이볼을 만들고 있다. /유진우 기자
버번 위스키야말로
켄터키가 세계에 선사한 독특한 선물이다.

자연이 빚은 이상적인 조건과
이민자들이 지킨 양조 비법이 결합해
버번 위스키를 만들었다.


위스키 컨설턴트 한스 오프만

미국 이민사(史)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를 빼놓을 수는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다. 아일랜드가 영국 식민지였던 19세기 중반, 조상이 흉년을 피해 대서양을 건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모친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난 뒤 첫 해외 방문지로 스코틀랜드를 택했다.

이 두 나라는 세계적인 위스키 생산국이다. 보통 위스키라고 하면 스코틀랜드에서 만드는 스카치(Scotch) 위스키를 떠올린다. 아일랜드에서 나오는 아이리시(Irish) 위스키 애호가들은 원조(元祖) 위스키야말로 아이리시 위스키라고 주장한다.

두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19세기 미국 켄터키주(州)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내 절망에 휩싸였다. 켄터키 땅은 보리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보리는 스카치 위스키와 아이리시 위스키를 만드는 핵심 재료다.

이들은 대안으로 옥수수를 심었다. 당시 미국 연방은 옥수수 경작을 장려했다. 1776년 버지니아주 옥수수 재배 및 주거권 법안을 보면 ‘옥수수를 심고, 밭 옆에 오두막을 지어 살면 400에이커(약 49만 평) 토지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 옥수수만 키우면 축구장 230개 규모 땅을 무상으로 준다는 의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수수를 주원료로 한 버번 위스키가 탄생했다.

지난달 23일 켄터키에서 만난 에릭 그레고리 켄터키양조자협회(KDA) 회장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 가운데 위스키 양조 기술을 익혔던 양조업자들이 이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옥수수로 조리법을 조정했고, 1780년대부터 옥수수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위스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법적으로 버번 위스키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원액을 만들 때 옥수수 함량이 51%를 넘어야 한다. 이 원액을 불에 그슬린 새 참나무통에 넣어 묵혀야 한다. 단 하루라도 괜찮다. 버번 위스키는 최소 숙성 조건이 없다.

무엇보다 미국 땅에서 만들어야 한다. 미국 전역에서 버번 위스키를 만들지만, 켄터키주 생산량이 전체 95%다.

그레고리 회장은 “버번 위스키는 곡물에서 나오는 단맛이 새 참나무통에서 나오는 강한 바닐라 향과 조화를 이뤄 달콤하고 알싸하다”며 “켄터키는 지하수에 철분이 없고, 다른 미네랄이 풍부해 목 넘김이 부드러운 위스키를 만들기 좋다”고 말했다.

위스키는 40~60%가 물이다. 이런 미네랄들은 위스키 맛과 향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발효 단계에서도 물에 따라 위스키 맛이 바뀐다.

켄터키 사람들은 이 지역 지하수를 센 물(hard water)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경수(硬水)라 부르는 물이다. 이 센 물이 버번 위스키 비밀 재료다. 물 경도는 물에 녹은 무기염 양으로 측정한다. 칼슘과 마그네슘에 각각 가중치를 둬 더한 수치가 높을수록 경수에 가깝다.

세계적인 위스키 평론가 짐 머레이는 “켄터키 석회암 매장지를 통과해 흐르는 물이야말로 버번 위스키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라며 “이 지역 물은 위스키 효모가 발효하는 과정에서 먹고 자랄 미네랄이 충분할 뿐 아니라, 철분을 자연적으로 여과해 위스키 색이 탁해지는 현상을 막는다”고 말했다.

이제 켄터키에는 사람보다 위스키를 숙성하는 참나무통 숫자가 훨씬 많다. 켄터키 전체 인구는 450만 명 정도다. 켄터키양조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켄터키주 내 증류소들이 보관 중인 위스키 참나무통은 1260만 통을 넘겼다.

켄터키주 최대 도시 루이빌 도심에는 이름난 증류소가 잇따라 들어섰다. 위스키를 직접 만드는 인구가 2만3000명에 달한다. 이들이 받는 임금만 매년 2조2000억원이다.

관광 가이드나 위스키 판매, 호텔 같은 간접 고용 효과를 감안하면 종사자 수는 10만 명을 넘길 가능성이 크다고 켄터키양조자협회는 추산한다.

버번 위스키와 함께 켄터키를 상징하는 켄터키더비 경마 장면이 그려진 공공 전시물. /유진우 기자

최근에는 버번 위스키 증류소를 줄줄이 찾는 순례 관광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와일드 터키 같은 인기 증류소를 방문하는 켄터키 버번 트레일과 소규모 증류소를 소개하는 켄터키 버번 트레일 크래프트 투어는 모두 250만 명 이상이 찾았다. 켄터키를 찾는 외부인 가운데 73%가 버번 위스키 양조장을 방문한다.

협회에 따르면 켄터키 증류 업계는 지난해 주 정부에 위스키 관련 세금으로 3억5800만달러(약 4900억원)를 기여했다. 켄터키산 옥수수, 호밀 대부분을 사들이는 핵심 구매처도 위스키 증류소들이다.

그레고리 회장은 “캘리포니아가 프랑스 못지않은 고급 와인 생산지로 떠오른 것처럼 켄터키도 250년 넘게 기술적인 시도를 거듭하면서 이제 스코틀랜드에 맞설 만한 위스키 생산지로 성장했다”며 ”켄터키에서 버번 위스키는 특별할 때 마시는 술이 아니라 일상에 항상 함께하는 음료라는 점을 방문객에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켄터키에서는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버번 위스키가 함께했다.

한낮에도 켄터키 사람들은 민트 줄렙, 올드 패션드 같은 버번 위스키 기반 칵테일을 즐겼다. 좋은 평을 받는 고급 레스토랑들은 고기 양념에 버번 위스키를 졸여 넣었다고 자랑했다. 도심 베이커리에서는 다양한 케이크에 버번 위스키 시럽을 사용했다.

세계적인 위스키 평론가 찰스 매클린은 “버번 위스키는 과거부터 내려온 유산일 뿐 아니라 미래의 위스키”라며 “켄터키 장인정신과 혁신이 버번 위스키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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