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979년이 아닌 1987년에 민주화가 됐나···전두환 정권 다룬 학술서 ‘제5공화국’ 출간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존속했던 제5공화국은 본격적 학술연구의 ‘사각지대’로 꼽힌다. 5공화국과 관련한 정치학계의 연구는 주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최근 펴낸 <제5공화국>(역사공간)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연구자들의 마음이 제5공화국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제한했다면서 “(민주화 이전 시기인) 제5공화국 동안 우리 사회가 겪은 사건과 경험을 간과해서는 민주화뿐 아니라 공고화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책에서 강 교수는 “제5공화국의 시기는 한국 사회가 군부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항구적으로 벗어나는 데 역설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은 ‘왜 한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이 아니라 1987년에 민주화를 이뤘나’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과 1985년 2월12일에 치러진 12대 국회의원 선거가 민주화 여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이뤘다고 지적한다.
1979년 10·26 이후 급격한 정치적 변혁을 우려한 국민 다수는 신군부의 지배를 수용했으나,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군부 지배를 끝내야 한다는 민주화의 열망이 커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물리적 강제력에 의한 통치가 얼마나 큰 반발에 처할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1987년 6월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군사력 동원을 주저하게 한 계기가 됐다.
2·12 총선은 제5공화국 시기 진행된 도시화와 중산층의 부상 등 사회경제적 변화가 정치적 재편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총선 결과 신생 정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이 관제 야당들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 배경에는 20세~39세 유권자 비중의 증가, 도시화의 진전, 대학생 숫자 증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다수 국민이 수용 가능한 민주화의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반권위주의의 대중적 저항을 주도해갈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제도권 야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강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1987년 민주화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 평가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논의(<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상반된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화된 정치 질서에서의 잠재적 대안 세력으로서, 최대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민주화를 향한 힘을 결집한 중심체는 제도권 야당인 신한민주당이었다.”
<제5공화국>은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한국학 대형기획 총서 사업’ 중 하나인 ‘20세기 한국학술총서’의 첫 성과다. ‘20세기 한국학술총서’는 향후 식민지, 분단과 전쟁, 권위주의, 산업화 등 20세기 현대사를 주제로 2029년까지 총 50권의 총서를 펴낼 계획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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