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 에세이? 정체불명 장르로 잭팟 터뜨리다…‘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제목이 독특해서 책을 살펴보다 출간했어요. 선인세도 낮아 부담이 없었고요. 순전히 호기심이 발동해서 낸 거예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심경보 곰출판 대표(51)가 말했다. 미국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의 첫 책인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2021년 12월 국내 출간된 후 올해 5월까지, 2년 반 동안 30만 권 넘게 판매되며 화제가 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교보문고와 예스24가 각각 집계한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에도 이름을 올리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서울 강서구 곰출판에서 지난달 31일 만난 심 대표는 “이런 숫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며 웃었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과학에 관심이 많다. “합리적인 사고를 키우는데 과학이 도움이 되니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철학과도 연결되고요. 과학을 잘 몰라서 더 알고 싶은 이유도 있어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삶의 혼란을 느낀 저자가 어류 전문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내용이 골격을 이룬다. 아내와 아이를 병으로 연달아 잃고, 오랜 기간 분류해 놓은 물고기 표본 대부분이 지진으로 처참하게 망가졌지만 꿋꿋이 연구를 이어간 조던의 놀라운 생명력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일종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그의 생을 따라가다 저자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 현장으로 달려가고 관계자들을 만난다. 에세이, 과학자의 전기, 스릴러, 르포, 인터뷰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된 독특한 형식이다. 초반부를 읽을 때는 ‘이게 뭐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고 약간 지루한 느낌도 든다. 한데 계속 읽다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과 전개에 당혹스러우면서도 궁금증이 커져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달리게 된다.
“가깝게 지내는 번역자 선생님에게 원서를 보내드리고 의견을 여쭤봤어요. ‘순수 과학책이 아니라 객관적인 의견을 드리기는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어요. ‘아마존에서 독자 리뷰가 좋으니 일반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책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이셨고요.”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국 기자가 쓴 첫 책이어서 순수하게 책 내용으로 승부를 봐야했다. 심 대표는 해외 사이트에서 서평을 비롯해 저자에 대한 내용 등을 추가로 확인한 후 판권을 계약했다.
“선인세는 3000달러로 최소 금액에 가까워 부담 없이 책을 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번역을 맡은 정지인 선생님이 ‘과학이란 렌즈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책으로, 내용이 참 좋다’고 하셨어요. 외주 편집자도 ‘지금까지 작업한 외서가 꽤 많은데 이 책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다’고 해서 조금 기대가 되기는 하더라고요.”
책을 번역하고 제작하는 사이 미국에서는 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큰 화제가 됐다. 다만 미국과 한국 독자가 다르기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어도 한국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초 책은 2021년 11월 출간할 예정이었다. 12월이 되면 연말 분위기 때문에 책 판매가 주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보니 기간이 좀 더 걸렸다.
“해를 넘겨 2022년 1월에 낼까 고민했어요. 새해 계획으로 독서를 꼽는 사람들이 많아서 1월에는 책 판매량이 늘어나니까요. 그래도 기왕 완성된 거, 일단 출간하기로 결정했죠.”
2021년 12월 중순 출간한 후 3주 뒤인 2022년이 시작되자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김겨울 작가가 운영하는 유튜브 ‘겨울서점’에서 책을 소개하고,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도 추천하면서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시 1인 출판사라 홍보를 많이 할 여력이 없었어요. 몇몇 분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했는데 일정 때문에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고요. 그래서 추천사도 싣지 못했어요. 평소처럼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리고 책에 관심 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책을 보냈어요. 책을 읽어본 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량이 치솟았습니다.”
독자들은 ‘신선하고 놀랍다’, ‘사랑과 삶의 가치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본보를 비롯해 여러 언론사와 주요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책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특별 한정판도 여럿 제작했다. 밀리의 서재와 김겨울 작가가 협업한 버전을 비롯해 예스24와 손잡고 각각 특별 한정판을 냈다. 양장본도 출간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서 20기 출연자 현숙이 이 책을 읽었다고 밝히면서 판매량이 더 늘었다.
“좋은 책은 결국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저만의 촉이나 눈썰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웃음)”
“출판사에서 5년 동안 일한 후 IT기업에서 근무했어요.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책을 좋아해서 출판사를 차렸죠. 대단한 걸 바라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적자가 이어지니 출판사를 계속 운영해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됐어요.”
2015년 아이가 태어나 가장으로서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1인 출판사는 계속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기에 자전거 페달을 밟듯이 멈추지 않고 책을 만들었어요. 돈은 최대한 안 쓰고 버텼죠.”
그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이른바 ‘잭팟’을 터뜨리며 그동안 받은 대출을 모두 갚고 수익도 낼 수 있었다. 지난해 직원도 한 명 채용했다. 지금도 한 달 평균 5000권이 판매돼 출판사의 ‘효자’를 넘어 ‘기둥’ 노릇을 톡톡히 한다.
곰출판은 과학을 비롯해 영화 음악 등 예술 분야 책을 주력으로 낸다. 인문 에세이, 철학 분야 책도 만든다. 심 대표는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책보다는 생명이 긴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이 될 책이 무엇인지 늘 생각해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는 책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내용을 담은 책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세대를 거듭해 오랜 시간 사람들이 계속 읽는 책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곰출판·2021년)는…
미국 과학 전문 기자인 룰루 밀러는 인생에서 큰 혼란을 느끼자 어류 전문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의 삶을 추적한다. 조던이 고난이 닥쳐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던은 어릴 때부터 지도 만들기, 식물 표본 수집하기 등 자신이 매료된 대상을 집요하게 파악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했다. 분류학자가 된 조던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어류를 수집하고 이름을 붙였다.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은 조던과 그의 동료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조던은 미국 스탠포드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던은 아내와 아이를 병으로 연이어 잃고, 벼락으로 인한 화재로 물고기 표본이 모두 사라졌지만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수십 년간 만든 어류 표본이 지진으로 박살나고 표본의 이름표들이 흩어져버린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바늘로 어류 표본에 이름표를 꿰어 붙이는 방식으로, 같은 일이 벌어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며 연구를 계속했다. 어떤 장애물에도 개의치 않고 어류에 이름을 짓고 분류하는 작업에 몰두한 조던은 사회 역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위계를 만들려 했다. 이를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저자는 논문과 여러 전문가들을 통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어리둥절한다. 책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나아가 인간이 만든 위계, 질서가 과연 타당한지 그리고 올바른지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조던의 일생은 시간 순으로 나열하기보다 구체적인 사실에 저자의 해석을 곁들여서 소개한다. 독자의 손을 이끌고 조던이 있는 현장으로 데려가 직접 보여주듯이 묘사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도 자세하게 소개한다. 생화학자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어머니에게 커피를 만들어 주고 세 딸을 다정하게 보살폈다. 학생들에게도 헌신적이었다. 개구리 다리, 전기가오리 내장 등 실험 뒤 버려지는 것을 요리해 맛보기를 즐기고, 소매 때문에 시험관을 쓰러뜨리는 일이 너무 많다며 가위로 옷 소매를 죄다 잘라버리는 괴짜이기도 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어린 딸에게 “의미는 없어”라고 잘라 말하고,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거지”라며 과학자답게(?) 칼같이 말한다. 아버지의 이 말은 저자에게 오랜 기간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저자의 내밀한 인생 이야기에 조던의 삶,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안을 확인하며 현장을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 등을 엮어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 발랄하고 거침없는 필력으로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매끄러우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녹여낸다.
처음 읽을 때는 다소 혼란스럽지만 페이지를 계속 넘기다보면 예상치 못한 사실들이 속속 밝혀져 놀라게 된다. 사회 및 역사적 이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등 낯설면서도 유쾌한 경험을 선사한다. 여러 가지 맛을 느끼게 하는 정체불명의 매혹적인 요리 같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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