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이 1년 살기' 가능? 성공하면 나에겐 뭐가 남을까 [스프]
지난 5월 1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됐던 전주영화제, 특히 동시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담은 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삶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나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는 동안 평생에 걸쳐 이어진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삶의 궤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는 중장년에 비해 정체성이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은 청년이 갖는 불안감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박정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담요를 입은 사람>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군인 출신인 박정미 감독은 원래 영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다큐를 만들 목적으로 촬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 다큐는 박정미 감독이 치열한 삶을 요구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껴 세운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됐다.
프로젝트의 제목은 '1년 동안 돈 쓰지 않고 영국에서 살아남기'다. 철없어 보이는 이 프로젝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촬영 후 편집을 거쳐 영화로 탄생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나 확신이 없는 채로 단지 자신이 세운 프로젝트를 기록으로 남길 목적이었다.
세계 곳곳에 있는 공동체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수많은 위기를 한 고비 넘겨내는 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살기 위해서는 주거할 곳과 음식은 필수다. 그것만 해결되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인다. 자전거를 기증받고, 한 달간 보트를 무료로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으면서부터 무료 여행은 시작된다.
음식점과 시장에서는 팔다 남은 멀쩡한 음식과 채소를 그대로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놓기 때문에 잘만 고르면 성찬을 누릴 수도 있다.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냈지만 박정미 감독은 공동체 일원의 도움을 받아 버려진 음식 챙기기에 성공한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을 견디어내는 삶은 어떤 느낌일까. 운이 나쁘면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세계 곳곳에서 자유롭고 자연 친화적인 특별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도움으로 숙식 문제를 해결해 간다. 특히 이란에서는 찾아온 손님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종교적 문화 덕분에 순탄한 여행이 되는 듯했지만 위기가 찾아온다.
히치하이킹은 여성에게 특히 위험하다. 실제로 돈다발을 내밀며 섹스를 요구하는 운전자도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의 천국처럼 느껴졌던 이란에서 오토바이를 얻어 탔다가 목숨을 위협당하는 위기를 겪는다. 목적지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는데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알라를 외친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화를 감독은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무사히 프로젝트에 성공한 그녀는 자신감과 성취감으로 행복을 만끽했을까. 프로젝트를 마칠 무렵 그녀는 여전히 불안정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로젝트에 성공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미지수다.
그렇다면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큐를 보면 그 안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생각됐을 때도 어딘가에 출구가 생긴다. 그러다가 곧 또 다른 벽이 나타나지만 그 느낌은 처음처럼 그렇게 막막하지는 않다.
싱가포르 출신 숀 네오 감독의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과 앤서니 첸 감독의 중국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에서도 비슷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제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두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불안하다.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이라고 번역된 제목처럼 끝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브레이킹 아이스>에서처럼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인지, 반대로 얼음을 깨고 싶어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해결책이 존재하기나 하는지 본인도 알지 못한다.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은 숀 네오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주인공인 미쓰에는 새로운 삶을 찾아 싱가포르로 갔지만 방황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고향의 설경에 파묻힌 그녀의 모습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안정감이 느껴진다.
숀 네오 감독은 불확실한 정체성으로 방황했던 자전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생을 묘사한 듯한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자신 안에 있는 벽과 한계를 가늠할지도 모른다.
앤서니 첸 감독의 <브레이킹 아이스>에서는 세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안생역으로 친숙한 배우 주동우가 여주인공을 맡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우연히 여정을 함께 하게 됐는데 각자 문제를 가슴에 안고 있다. 영화는 간접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드러낸다. 여성이 지닌 우울감의 정체는 영상을 통해 짐작하게 된다.
피겨스케이터였던 여성은 부상으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한 남성의 문제점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성공을 향해 질주했고 이제 연봉 높은 회사에 취직해 목표에 도달한 듯 보이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다. 여성은 처음 만난 그에게서 자신의 가슴에 뚫려 있는 구멍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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