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 중추, 시화·반월공단에 ‘매물’이 쌓인다
● 공단 거리 곳곳에 걸린 ‘급매’ ‘임대’ 플래카드
● ‘사겠다’는 사람 없고, ‘팔겠다’는 사람만 늘어
● 매출 축소, 전기료 인상, 고금리 3중고 직격탄
● 1년 전보다 20% 하락했지만 거래는 한산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던 시기, 제조업 강국 코리아를 뒷받침한 두 국가산단은 서울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지하철 4호선으로도 갈 수 있고, 자동차로 가면 1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공단에 들어서자 '급매' '매매' '임대'라고 써 붙인 플래카드가 외지인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다. '나대지'를 팔겠다는 플래카드도 눈에 들어왔다. 한국 제조업의 중추, 시화·반월공단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위치한 안산스마트허브(반월국가산업단지)는 1970년대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 차원에서 국가 주도로 조성된 산업단지다. 원래 논밭과 갯벌이던 지역을 산업단지와 주거 및 상업지역, 녹지까지 어우러진 계획도시로 개발했다. 1977년 조성하기 시작해 1987년에 완공했다. 고잔신도시가 이때 함께 건설됐다.
공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
9000여 개 업체가 입주해 있는 반월산단에는 조립금속과 화합물·화학제품, 섬유제품, 1차 금속산업과 펄프·종이제품, 음식료품 업체가 주로 입주해 있다. 인천항이 공단에서 가깝고 서해안고속도로와 신갈∼안산고속도로, 시흥∼안산고속도로, 수인산업도로 등이 지나 원자재는 물론 생산 제품 반출이 용이한 장점을 갖고 있다.
반월단지, 인천 남동산단과 함께 시화산단은 3대 중소기업 산업단지로 꼽힌다. 기계류와 전기·전자, 석유화합 업종이 많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부품·소재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 수출 견인차 역할을 하는 자동차와 일반 기계, 석유제품류에 들어간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 비중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품목은 반도체였다. 이어 자동차, 일반 기계, 석유제품과 석유화학제품 순이었다. 이른바 자동차·화학제품·정유류 등 차·화·정이 한국 수출을 주도할 때 시화·반월 공단 입주 기업도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중국과 동남아 등 저렴한 외국산 제품들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국내시장까지 잠식하면서 최근 들어 임가공 제조업체 가운데 공장을 팔려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20년 넘게 시화·반월산단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해오고 있는 권영순 공인중개사는 "경기침체와 고금리 영향으로 공장을 팔겠다는 매물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장 매입 때 많은 대출을 끼고 산 사업주들이 금리가 크게 오르면서 이자 부담을 감당 못 해 공장을 팔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차에서 매입 전환 거의 없어"
"공장 매물은 꾸준히 늘고 있다. 팔아달라는 매물은 하루가 다르게 쌓이고 있는데, 팔리지는 않는다. 상대적으로 매매에 비해 임대는 조금 되는 편이다. 과거에는 공장을 임차했던 사장이 매출이 늘면 임차한 공장을 사곤 했는데. 지금은 임차에서 매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장 매입 건수가 준 이유가 뭐라고 보나.
"아무래도 고금리 영향이 크다. 공장 살 때 현금으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대출을 끼고 사는데, 지금은 이자 부담이 커 임차료 정도 부담하고 소규모로 임가공하려는 사람만 있다. 공장 말고 기계를 중고로 내놓은 공장도 많은데, 팔리는 경우는 드물다."
매매가격은 어떤가.
"아직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진 상황은 아니다. 코로나 이전에 비해 최근 몇 년 사이 공장 가격이 30% 가까이 올랐다. 평당 700만 원 하던 공장이 1000만 원까지 호가가 뛰었다. 그러다 1∼2년 전부터 가격이 하락했다. 현재 코로나 이전 수준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다. 고점 대비 20% 정도 내려온 정도다. 지금은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하는 공장 일부가 급매로 정리되는 수준이다. 최근에 대로에 인접한 한 공장이 800만 원대에 거래가 성사됐다고 들었다."
시화공단은 소규모 공장이 많고 반월공단에는 상대적으로 큰 규모 공장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임대와 매매 모두 반월공단에 비해 시화공단에서 더 빈번하게 이뤄진다고 한다.
"공장 건축비가 최근 크게 올랐다. 지난해 평당 250만 원 정도였는데. 올해는 평당 350만 원까지 올랐다. 공장을 새로 건설하는 것보다 이미 잘 지어진 공장을 사는 게 더 낫다는 인식도 있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공장 중심으로 매수 문의는 이따금 들어온다."
고금리 여파로 매물은 크게 늘었지만 '공장 붕괴'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IMF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체감경기는 지금이 더 어렵다. 그렇지만 시장 붕괴 상황까지 온 것은 아니다. 경매가 쏟아져 나올 때가 최악인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경매로 나온 공장은 현재 2∼3개 정도다."
50년 가까이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L씨 사례는 한국 중소 제조업체가 처한 현실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광복 직후 6·25전쟁 이전에 태어난 그는 공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취업 대신 창업을 택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새마을운동에 자극받아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업에 열정을 불태웠다. 도시 인프라 관련 자재를 생산하는 그는 서울 팽창과 수도권 확장 등 급격한 도시화 덕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이어가던 1980∼90년대 그의 회사는 순풍에 돛 단 듯 거침없는 성장세를 이어갔다. 품목이 다양해지면서 추가로 공장도 여럿 지었다. 회사 키워가는 재미에 힘든 줄 모르던 시절이다. 그러다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줄 돈 다 주고 받아야 할 돈을 제때 받지 못해 부도 위기에 내몰렸지만 다행히 거래처 도움으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전기료는 2배, 금리는 3배 상승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 위기 이후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IMF 위기 때 자본과 기술력이 약한 경쟁업체들이 대거 쓰러진 덕에 반짝 매출 상승세를 경험했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저가 제품이 들어오면서 매출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신규 사업에도 손을 댔지만 호전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몇 해 전 한일 관계가 나빠져 일본 수출길이 막히면서 매출이 크게 줄어 적자로 돌아섰다. 최근 들어 일본 수출은 재개됐지만 이번에는 급격히 오른 전기료가 발목을 잡았다. 월 1억 원 정도 나가던 전기료가 2년 새 2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 매출은 줄고 비용은 늘어 불가피하게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그런데도 회사 사정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고금리가 발목을 잡았다. 저금리 시절 대출을 끼고 산 공장 부지 이자 부담이 크게 늘어 적자 규모를 키운 것이다. 결국 그는 사업 확장을 대비해 마련한 땅을 매물로 내놨다. 1년 넘게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매출은 줄고, 전기료는 2배로 뛰고, 대출 금리도 3배 가까이 오른 상황에서 자산 매각까지 이뤄지지 않아 운영자금 대출 규모를 크게 늘려야 했다. 만성 적자 늪에 빠져든 회사를 회생시킬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50년 가까이 이어온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2023년 법인파산, 2022년 대비 65.04% 증가
"늘 매출이 늘고 성장하는 기업은 없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업이 버틸 수 있도록 정부에서 시중금리보다 좋은 조건으로 정책금리를 적용해 자본 조달을 용이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규모가 작거나 매출이 줄어든 기업에는 추가로 대출해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계속해서 그의 얘기다.
"세계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신바람 나게 뛸 수 있도록 '기업 우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업 인정'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무엇보다 글로벌 대기업들이 앞장서서 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기업에 납품하며 회사 규모를 키우는 중견기업이 성장하고, 그 중견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이 성장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규제'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52시간, 중대재해처벌법 등 근로자 안전과 권익을 높이려는 노력 못지않게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의 애로 사항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그런 긍정적 선순환 생태계가 조성돼야 지금의 경기침체, 제조업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정부 규제가 심해지니 대기업은 하청기업에, 하청기업은 중소기업에 손실을 떠넘기려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영세한 중소기업들뿐이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로는 한국 제조업이 재도약하기 힘들다."
경기침체를 보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가 법인 파산 건수다.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도산 접수 건수는 20만5225건으로 2022년에 비해 1년 새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법인 파산은 물론 법인 회생과 개인회생, 개인파산, 면책 등 모든 유형에서 건수가 증가했다. 법인 파산의 경우 2022년 대비 지난해 65.04% 증가했고, 법인 회생도 54.92%, 개인회생도 34.51%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인·소상공인은 올해 경영환경이 지난해보다 더욱 악화됐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4월 29일부터 5월 8일까지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소상공인 6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년도에 비해 올해 '경영환경이 나빠졌다'고 느끼는 비율이 57.1%였다. '매우 어렵다'는 응답이 24.1%, '다소 어렵다'는 응답이 33%였다. '비슷하다'는 응답은 37.6%, '호전됐다'는 응답은 5.3%에 불과했다.
매출액이 낮을수록, 종사자 수가 적을수록 올해 경영환경이 지난해보다 '악화됐다'는 의견이 높았다. 종사자 수가 10인 미만인 기업의 경우 전년 대비 올해 경영환경이 어렵다는 의견이 68.3%로 세 명 중 두 명이 체감경기가 나빠진 것으로 답했다.
시화·반월공단 분위기도 이 같은 중기중앙회 설문조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권영순 중개사는 "상대적으로 큰 공장이 많은 반월공단 사정이 소규모 공장이 많은 시화공단보다 나은 편"이라며 "규모가 있는 공장은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있어 그나마 버티는데, 기계 한두 대 갖다놓고 임가공하던 영세 제조업체가 많은 시화공단에는 빈 공장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목소리는 국내외에서 잇달아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2020년대 들어 2%대로 하락한 경제성장률이 2030년대가 되면 0.6%로 더 큰 폭으로 하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도 '한국 경제의 기적은 끝났는가'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 경제의 기존 성장 모델은 이미 13년 전에 정점에 도달했다"며 "한계에 다다른 기존 모델로는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저출생에 따른 인구 감소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50년 한국 국내총생산은 생산가능인구가 35% 감소함에 따라 2022년보다 28%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한강의 기적' 토대가 됐던 값싼 에너지와 노동력에 기반한 한국의 기존 성장 모델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경공업에서 석유화학과 중공업으로 발 빠르게 전환하고, 반도체와 자동차 등 첨단 제조업에 집중한 덕에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한국 경제는 핵심 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FT 보도에서 송승헌 맥킨지앤드컴퍼니 한국사무소 대표는 "2005년부터 2022년 사이 국가 10대 수출 제품 목록에 디스플레이 하나만 새롭게 추가됐다"며 2012년 한국 정부가 선정한 120개 중점기술 가운데 36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했지만 2020년엔 그 수가 4개로 떨어졌음을 지적했다. 같은 보도에서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기존 성장 모델은 2011년 정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중국 기술 기업들은 최첨단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았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한때 한국의 고객사 또는 협력업체에 불과하던 중국 기업들이 경쟁자로 부상한 이후 한국 제조업 경쟁력이 세계시장에서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미래 한국 경제에 대한 경고가 과장됐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방산과 건설, 제약과 전기차,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한국 기업들이 새롭게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지식 기반산업 중심의 시화MTV
인구구조적 측면에서 한국은 저출생 심화로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할 처지이고, 경제 산업 측면에서는 경제성장 버팀목 구실을 해온 뿌리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 경제는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까.반월공단과 시화공단 아래쪽 시화호 북측 간석지에는 시화MTV(Multi Techno Valley)조성이 한창이었다. 301만 평 규모로 조성되는 시화MTV는 첨단·벤처업종 등 지식기반산업 중심의 연구개발 산업단지를 지향하고 있다. 대규모 물류센터 등 유통산업과 관광·휴양 등 여가 기능이 가미된 미래지향적 첨단 복합단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시흥시청은 시화MTV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제2외곽순환도로가 개통되면 인천항, 인천국제공항의 접근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예정이며 배후에 배곧 신도시, 시화지구 등 쾌적한 주거단지는 물론 서울대학교 시흥 스마트캠퍼스, 한국공학대학교 등 다수의 전문 연구인력 양성기관이 소재하고 있어 탁월한 투자 여건을 가지고 있다."
조성된 지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가까이 되는 반월·시화공단이 노후화한 사이 새로 조성 중인 시화MTV가 미래를 꿈꾸며 새롭게 조성되고 있다. 시화·반월공단이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의 경제적 성취를 상징하는 곳이라면 MTV는 대한민국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시화·반월공단 노동자 평균연령이 40·50대가 많은 반면 MTV는 20·30대 젊은 층이 많이 유입되고 있다. 대로에서 두 블록 차이임에도 중개업소에서 취급하는 물건의 대상도 크게 달랐다. 시화·반월공단 내 중개업소가 주로 공장 매매와 임대, 나대지 매매를 취급하는 것에 비해 MTV에 위치한 중개업소는 지식산업센터와 원룸을 취급했다.
옛것이 가고 새것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새롭게 형성되는 MTV가 '봄'과 '청춘'을 상징한다면, 시화·반월공단은 '가을'과 '중·장년'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해 질 녘 안산스마트허브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시화·반월공단의 옛 공장 굴뚝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저 멀리 MTV에 새롭게 높은 건물을 세우고 있는 크레인과 오버랩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다가왔다.
안산·시흥=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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