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오죽했으면…"기사 양반, 불지옥으로 갑시다" [오세성의 헌집만세]
"개나리 아파트가 좋더라"…외계어 홍수에 빛나는 옛 이름
국내에서 가장 긴 아파트 이름, 25자 달해
건설사 브랜드에 펫네임 붙으며 복잡해져
"간결했던 옛 이름만큼 파급력 있는지 의문"
재건축·재개발로 들어서는 서울 아파트마다 길고 복잡한 외래어를 이름으로 내세우는 가운데, 꽃 이름으로 눈길을 끄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강남구 역삼동 '개나리래미안'과 '개나리푸르지오', '개나리SK뷰'가 그 주인공입니다. 1970년대 삼호주택이 지었던 개나리아파트 1~6차가 재건축을 하면서 1차(개나리래미안)와 3차(개나리푸르지오), 5차(개나리SK뷰)가 역사를 이어가고자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옛 이름을 이어가는 이들 아파트 이름은 정겨우면서도 명료합니다. 옛 이름에 건설사 브랜드만 붙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변 다른 아파트 이름은 '래미안레벤투스', '삼성래미안펜타빌', '래미안도곡카운티', '강남센트럴아이파크', '래미안대치팰리스' 등 사뭇 복잡합니다. 건설사 이름과 건설사 브랜드, 지역명, 펫네임(애칭) 등을 한데 섞으면서 의미를 알기 어려워졌습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아파트에는 간단한 지역 명칭만 붙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소문아파트'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역명을 쓰지 않더라도 간결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강남구 대치동에서 30년 가까이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은마아파트'도 있죠. 하지만 아파트가 점차 늘어나며 단순한 이름으로는 서로를 구분하기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파트마다 '개나리', '무궁화', '진달래' 같은 이름들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유독 꽃 이름이 많이 쓰였는데, 1980년대 말부터 조성한 1기 신도시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양 평촌신도시에는 목련마을, 무궁화마을 등 구획 별로 마을 이름이 붙었습니다. 정식 지명은 아니지만, '목련2단지', '무궁화효성' 등 아파트 이름으로 현재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서소문아파트·개나리아파트…간단명료한 옛 아파트 이름
지역명에 건설사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성남 분당신도시에는 '시범 삼성한신' 이라는 아파트가 있습니다. 1기 신도시를 조성하며 처음 조성한 '시범마을'에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과 한신공영이 지은 아파트라는 의미입니다. 비슷한 작명 사례로 고양 일산신도시에는 '강선8단지럭키롯데'가 있습니다. 강선마을 여덟번째 아파트이고 럭키건설(현 GS건설)과 롯데건설이 지었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최근에는 지역명과 아파트 브랜드, 펫네임 등을 섞으면서 이름이 복잡하고 길어지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파주시 동패동에 있는 '초롱꽃마을6단지GTX운정역금강펜테리움센트럴파크'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초롱꽃6단지' 정도로 끝났겠지만,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를 강조하고 건설사 브랜드 '금강펜테리움'과 펫네임 '센트럴파크'까지 넣으면서 25자로 불어났습니다.
다음은 23자인 전남 나주시 빛가람동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입니다. 이 아파트는 1차와 2차로 나뉘는데, 이를 이름에 붙이면 마찬가지로 25자가 됩니다. 화성시 반송동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 인천시 중구 운서동 '영종하늘도시유승한내들스카이스테이' 등이 뒤를 잇습니다. 하나같이 기억하기 어려울 이름들입니다.
아파트 이름이 길어지다 보니 그에 관한 일화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 택시를 탄 할머니가 아파트 이름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기사 양반, 그 뭐더라…니미시벌 아파트? 거기로 가주시구려" 재치 있는 택시 기사는 할머니를 리젠시빌 아파트로 데려다 드렸습니다. 아파트 이름이 복잡해지며 나온 우스갯소리입니다.
공인중개사들 "복잡한 아파트 이름 탓에 계약서 실수하기도"
우스갯소리를 접한 한 택시 기사는 "실제 노인 분들은 길고 복잡한 아파트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워한다"며 "어떤 할머니가 불지옥에 데려다 달라기에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푸르지오였다"고 경험담을 털어놨습니다. 서울시가 공인중개사 315명을 상대로 시행한 조사에서는 22.5%가 단지 이름을 혼동해 계약서를 다시 작성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시가 서울시민 10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0%가 복잡한 아파트 이름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러한 불편 때문에 서울시는 올해 초 아파트 이름 가이드라인을 내놨습니다. 어려운 외국어와 애칭 사용을 자제하고 고유 지명을 활용해 적정 글자 수로 짓자는 취지입니다. 국내 대형 건설사들도 이에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강제력 없는 가이드라인은 금세 내쳐졌습니다.
올해 분양을 앞둔 서울 아파트들은 서초구 반포동 '반포디에이치클래스트', 강남구 도곡동 '래미안레벤투스', 강동구 성내동 '그란츠리버파크' 등 하나같이 외국어 섞인 이름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마저 강서구 방화동 공공임대주택인 ‘서울리츠 행복주택’ 이름으로 '방화 스카이포레’를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방화 하늘마루', '방화 하늘꽃' 등도 후보로 나왔지만, 선호도 조사에서 탈락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민간 건설사들은 수요자 선호도가 높다는 이유로 참여를 꺼리는 것입니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아파트 이름은 결국 조합원이 정한다"며 "고급스럽게 보이고자 복잡한 외래어 사용을 선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이어 "간혹 건설사 브랜드를 거부하는 조합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대부분 외래어를 채택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외래어를 사용했다고 아파트 이름이 고급스러워지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 '과천주공'이라고 하면 강남보다 집값이 비싸고 살기도 좋은 동네로 유명했다"며 "이제는 재건축을 거쳐 '래미안에코팰리스', '과천푸르지오써밋' 등의 이름이 붙었는데, 예전 과천주공만큼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있는 이름인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업계 관계자도 "당사자인 조합원들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정해야지 않겠느냐"면서도 "너무 길고 복잡한 이름은 고급스럽기보단 난해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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