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소득보장안, 늙음이 형벌 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나
연금개혁안을 둘러싼 입법이 급물살을 탄 듯 보인다. 정부의 단일안 없이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이라며 24개 시나리오를 국회에 던져 놓고 손을 놨던 지난해에 비하면 진일보한 상황이다. 여기에는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국회의 연금개혁 공론화 위원회가 5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소득보장안’과 ‘재정안정화안’을 놓고 진행한 조사에서 ‘더 내고 더 받는’ 소득보장안(보험료율 4%포인트 인상, 소득대체율 10%포인트 인상)이 채택된 것이었다. 이 결론은 복지를 위한 대규모 증세의 정치적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 입장을 취해온 필자에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이 결정은 재정안정안을 선택했던 1차 설문조사 결과가 학습과 숙의 과정을 거쳐 뒤집힌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국회 논의과정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얘기다.
두 번째 계기는 여야가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44%로 인상하는 수준에서 사실상 합의를 본 사건이다. 이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예상치 못한 양보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연금개혁을 자신의 우선 과제로 천명한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비판을 자초했다. 21대 국회에서의 처리는 불발됐지만 연금개혁은 22대 국회의 1호 정책과제가 될 것이며 지금까지 논의된 안에서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연금 정치가 본격화할 것이란 얘기다.
마지막 연금 개혁이 있었던 2007년 당시 민주노동당(현 정의당)의 연금개혁안에 깊이 관여한 오건호 박사에 따르면, 논의 초기에는 정부와 정당들이 자신의 연금개혁안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상대방 안의 이해 없이 조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 리포트에서 3차례에 걸쳐 연금개혁과 관련된 주요한 현안들을 소개하고 평가하려 한다. 이번에는 먼저 소득보장안(보험료 13%, 소득대체율 50%)을 다루고 다음 번에는 재정안정화안을 다룰 것이다. 여기에는 공론화위원회에 제시됐던 안(보험료 13%, 소득대체율 40%)뿐만 아니라 최근에 주목을 받는 세대 간 계정분리를 주장하는 ‘신연금안’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는 연금의 보장성과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정부 재정지원의 재원을 위한 증세(이른바 ‘사회보장세’)의 실현 가능성과 그 내용을 살펴볼 예정이다.
늙음이 형벌이 되지 않도록 만들 계획이 있는가
2019년 11월 출간된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조기헌, 이매진)는 알코올성 치매 초기의 아버지를 돌보게 된 20대 청년 보호자 얘기를 다룬다. 질병과 돌봄의 부담은 어느 시기 누구에게나 고된 일이지만 고령화 시대의 빈곤가정에 있어 이 문제는 더욱 버거운 일이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표현을 “두려움에 떨면서 썼다”고 토로했지만, 24시간 돌봄의 무게와 극한 상황에 놓인 개인의 심적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한 터라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단순히 개인의 돌봄 경험을 초월하여, 고령화 시대 빈곤 가정의 현실과 돌봄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부족이라는 심각성을 드러낸다. ‘빈곤가정’이라 했지만 사실 내 주변의 ‘꽤 괜찮은 일자리’를 가진 맞벌이 가구라 해도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는 동시에 부모에게 신체적·정서적·경제적 지원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를 토로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처럼 늙음이 형벌이 되지 않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연금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 소득보장안에 담긴 핵심 문제의식이다.
실제 가입 기간을 고려했을 때 소득보장안에 따르면 현재의 40% 수준의 소득대체율로는, 성실히 연금을 납부하더라도 노후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약 124만원)의 절반 정도인 62만원 정도만 받는다. 소득대체율 10% 포인트 인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하며 물론 이것이 다음 세대에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대 간 형평성에 대한 과한 집착이 개인의 노후 보장이란 연금 본래 목적의 훼손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정부는 연금에 대한 책임을 다해왔는가?
미 하버드대학의 스테파니 스탄체바에 따르면 조세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경제학 이론이 상정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매우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유권자가 조세 개혁안의 지지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은 효율성보다 공정성인데 이는 정부에 대한 신뢰와 매우 밀접히 연관이 있다고 한다.
연금도 마찬가지이다. 소득보장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부, 보다 정확히는 경제 관료들을 불신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한국의 정부는 필요할 때에는 연금을 쌈짓돈처럼 사용해 왔으면서도, 정작 연금에 대한 책임은 회피해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국가재정의 18% 정도를 공적연금 지원에 사용하는데 한국은 10% 수준이다. 그런데 이 수치에는 공무원연금 지원예산이 포함돼 있다. 이를 제외하면 실제 정부 지원은 주로 기초연금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제외한 국민연금 지원금액은 예산의 0.1%에 그친다.
또 다른 불신 지점은 목적에 있다. 소득보장론자들은 재정안정론자들이 기금의 안정적 운영을 절대시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노후의 경제적 위험 해소는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설사 기금이 고갈된다고 해도 연금 지급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기금적립식에서 부과방식으로 전환한 유럽 국가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또한 모든 사회보험이 반드시 적립금을 쌓아 놓고 운영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 건강보험은 부과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큰 문제는 없다.
그동안 예산 당국은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상태에서 최대한 재정을 다른 데에 덜 써야 국면연금에서 난 결손을 그나마 메울 수 있다’는 논리로 재정확대 요구에 저항해왔다. 그런데 막상 연금의 결손이 문제가 되니 보험료율 인상만 언급할 뿐,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재정의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재정보수주의에 사로잡힌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재정 관료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켜 연금개혁을 더 어렵게 만든다.
세대 간 연대를 고려한 재원방안이 충분히 담겨있는가
현재의 연금은 현 세대가 다음 세대에 의해 부양될 것을 기대하며 기금을 납부하는 구조다. 그런데 현재처럼 한 세대 만에 가파른 인구절벽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는 세대 간 연대는 세대 간 전쟁으로 쉽게 전환된다. 소득보장안을 실행할 경우 현 세대의 연금 지출액을 충당하기 위한 최대 보험료율이 다음 세대 소득의 43%까지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득보장론자들은 국고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소득보장론자의 계산에 따르면 기금고갈이 문제가 되는 2065년의 보험료율은 32.4%인데, 만약 국고지원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1% 증가할 경우 보험률은 약 3.8% 포인트 감소하게 되어 다음 세대의 보험료 부담이 경감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 주장이 ‘절반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국고지원은 궁극적으로 조세수입을 통해 조달될 수밖에 없는데 만약 그 조세수입이 노동소득에 대한 과세수입에 기반을 둘 경우 다음 세대의 부담은 거의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소득보장론자들은 국고지원이 필요하다는 원론적 입장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재정을 조달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상세하고 명확한 입장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소득보장론자들은 소득대체율 인상을 위한 연금에 대한 재정투입은 소득역진적 성격을 갖는다는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오건호 박사 분석에 따르면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 시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연금액이 현행보다 월 25만원 증가하는 반면, 월 600만원의 소득자는 월 45만원 늘어난다. 이는 정부의 재정지원이 오히려 고소득자에게 보다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소득보장론자들은 이후 국회 논의과정에서 예산을 보험료 지원보다는 저소득층의 보험료 지원제도와 가입 기간을 늘려주는 크레딧 제도 등에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최한수 |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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